'지구상에서 서로간에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미국의 진보·인권운동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퀴즈 문제다. 이들이 낸 문제의 답이 '북극에서 남극까지'이거나,'(아시아의)에베레스트에서 (남미의)아콩카구아까지'일 리는 없다. 정답은 '브루클린에서 맨해튼까지'다. '(맨해튼의)할렘에서 다운타운까지'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물론 난센스 퀴즈다. 브루클린에서 맨해튼까지는 두 섬 사이의 이스트 강을 잇는 다리(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면 그만이다. 할렘에서는 브로드웨이를 타고 10km 정도만 내려가면 월가가 있는 다운타운이 나온다. 퀴즈에서의 '거리'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계층간의 거리다. 브루클린과 할렘은 미국의 대표적 흑인 빈민층 집단주거 지역이다. 슬럼(빈민가)의 흑인이 인종·계층의 각종 차별을 딛고 백인 주류사회에 진입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 권부(權府) 구성은 이런 블랙 조크를 무색하게 한다. 1차 걸프전쟁 때 연합군 총사령관을 거쳐 국무장관을 맡고 있는 콜린 파월은 브루클린 빈민가 출신의 자메이카계 흑인이다. 부시 행정부의 '소(小)통령' 소리를 듣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흑인에다가 여성이라는 2중 핸디캡을 딛고 대통령의 최측근 자리에 올랐다. 소수 인종(흑인),빈민에 이민자 출신,여성이라는 제 각각의 악재를 이기고 출세한 이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은 또 있다. 소수 인종 등에 대한 취업·대학 입학 등에서의 특별 쿼터 배정 등 보호정책을 탐탁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이 진보정당인 민주당을 마다하고 굳이 보수 노선의 공화당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에 대해 '수구(守舊)의 정체를 위장하기 위한 백인 기득권층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폄하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라이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항변했다. "피부 빛깔이 검다고,여자라는 이유로 특별한 보호를 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나 차별없이 경쟁해서 승리할 수 있도록 게임의 룰을 확립하는 일이다. 약자 보호를 이유로 정부가 게임에 개입할수록 경쟁의 활력이 사그라들고,게임 참가자들의 성취 의욕도 꺾일 뿐이다." 한국계 이민 1세대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두 차례나 당선됐던 김창준씨도 자서전에서 비슷한 소회를 밝혔다. "미국의 일부 공공·교육기관 등에서 소수자 할당법(Affirmative Action)을 시행하고 있지만 그 결과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약자를 더 의존적인 체질로 만들고,주류 계층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방화벽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지난 '4·15 총선'에서 대거 약진한 것을 발판으로 사회적 약자 계층에 대한 보호장치 강화를 다짐하고 있는 이 땅의 '진보세력'들과 같이 새겨 봤으면 하는 화두(話頭)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일어서기 힘든 장애인과 극빈자 등에 대해서는 당연히 사회가 최소한의 안전망을 마련해줘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서 '과정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행위는 시장경제의 활력소인 '경쟁'의 본질을 부정하고,그 결과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우리는 영국 독일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의 '복지과잉 노선 실패'에서 이를 목격한 바 있다. 우리 사회가 지난 40여년간 압축 성장가도를 달려오면서 공정하지 못한 경쟁의 룰이 작동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왜곡을 바로잡아 모두가 갈채를 보낼 수 있는 진정한 '승자'들을 최대한 길러내야지,경쟁할 의욕을 빼앗는 정치는 안된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