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에 기표하면서 민주사회에 산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지난 1월 입국, 최근 탈북자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탈북자 강일씨(61)는 15일 오전 17대 총선 투표장이 마련된 서울 강서구 방화동 느티나무교회를 찾아 남한에서의 첫 투표권을 행사했다. 강씨는 "어젯밤에도 후보중 누구를 찍을 지를 놓고 동료 탈북자 2명과 4∼5시간이나 토론하는 등 고민을 거듭한 끝에 지지후보와 정당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지난달 18일 하나원에서 출소하자마자 이렇게 빨리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며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투표를 자주 했지만 한 사람을 후보로 내놓고 무조건 찬성해야 하는 선거였다"면서 "권리행사가 아니라 짐이 될 뿐"이라고 회고했다. 지난 2001년 10월 남편, 아이 둘과 함께 입국한 탈북자 한모씨(42ㆍ여)에게는 이번 총선이 2002년 대선에 이어 남한에서 맞는 두번째 선거. 현재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 중인 한씨는 "선호하는 정당을 기준으로 후보자를 선택했다"며 "국회의원이 정당의 정책에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선택 이유를 들었다. 한씨는 "낯선 남한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너무 힘들어 후회한 적도 있었다"면서 "그러나 요즘은 옳은 선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오늘 투표를 통해서도 이를 다시 한번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 2002년 입국한 탈북자 안모씨(20ㆍ여)는 이날 오전 서울 송파구의 집 근처 투표장을 찾아 난생 처음으로 '한 표'를 행사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학원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안씨는 "북에서는 나이가 어려 투표를 하지 못했다"며 "오늘 내가 선택한 사람이 나라를 잘 이끌어가는 의원이 됐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탈북자 중에서도 젊은 신세대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기권자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북한에서 6년간 군인으로 복무하다 2002년 귀순, 연세대에 다니는 탁모씨(23)는 14일 밤 늦게까지 선거 관련 TV프로그램을 보며 고민하다 결국 기권을 선택했다. 탁씨는 "지난 대선 때는 투표했으나 최근 탄핵 정국, 부정부패 공방 등을 둘러싼 다툼을 보고는 실망했다"며 "주변에 알고 지내는 탈북 친구 9명중 투표를 하겠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탁씨는 "기권하는 젊은 탈북자 사이에서는 남한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소외감도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정수기능대학에 다니는 탈북자 최모씨(20)도 "투표에 참여해도 별로 바뀔 것이 없을 것 같고 관심도 없다"며 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