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첨단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대표적 기업의 창업주들이 최고 경영자(CEO) 자리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CEO와 회장을 겸임하던 이들은 일상적인 경영에 시간을 쏟아야 하는 CEO 자리를 내부 사장에게 물려준 뒤 회장 자격으로 기업의 전략이나 소비자 욕구 파악 등 굵직한 업무에 치중하고 있다. 이같은 흐름은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주주들의 압력에 못이긴 수동적 분리와 맞물려 업종에 관계없이 점점 더 확산될 전망이다. 미국 최대 컴퓨터 회사인 델을 세운 마이클 델 회장 겸 CEO(39)는 창업 20년을 맞아 오는 7월 16일부터 CEO 자리를 케빈 롤린스 사장에게 넘겨주기로 했다고 4일 발표했다. 델 회장은 "롤린스 사장에게 CEO 자리를 넘기는 것은 나와 롤린스 사장간에 역할 분담이 이뤄져 있는 것을 반영하는 것뿐"이라며 "앞으로는 기술이나 소비자 욕구 변화에 주력하겠다"고 설명했다. 회사측은 델 회장이 CEO를 내놓았지만 일상적인 비즈니스에 관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델 회장은 20년 전 텍사스 대학 기숙사에서 델을 창업한 뒤 전화나 인터넷으로 주문한 소비자들에게 컴퓨터를 직접 파는 전략으로 대기업을 이뤄냈다. 앞서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운 빌 게이츠 회장도 지난 2000년 동료인 스티브 발머 사장에게 CEO 자리를 넘겨줬다. 1968년 인텔의 창업 멤버로 참여한 앤드루 그로브 회장은 30년이 지난 1998년 당시 사장이었던 크레이크 배럿에게 CEO를 넘겨주고 회장 역할만 맡고 있다. 오라클 창업주로 27년간 제왕적인 경영자로 군림해온 래리 엘리슨도 최근 회장직을 내놓고 CEO직만 갖기로 했다. 평화적인 CEO 승계는 투자자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베어 스턴스의 분석가인 앤드루 네프는 "CEO를 내부 사장에게 평화적으로 승계하는 것은 그 사장이 CEO 자리를 찾아 다른 기업으로 떠날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확신을 투자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이다"고 분석했다. 뉴욕=고광철 특파원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