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5단체 부회장들이 산업평화선언을 제의했고,박길상 노동부차관은 노사정위 상무위원회에서 '지금의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노사정위 차원 산업평화선언을 검토해 줄 것'을 제안했다. 필자는 평소 선언문 채택 같은 것에 다소 냉소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엄정한 집행을 담보할 수 있는 법제도의 확립이나,권리와 의무를 명확하게 규정한 당사자간 계약이 그 기초가 돼야 하는데,선언문만 채택하면 무엇하겠느냐는 뜻에서 그렇다. 법과 계약을 벽돌에 비유한다면,노사협의나 좋은 인간관계의 정착 및 산업평화선언 같은 것은 벽돌과 벽돌을 밀착시키는 '사춤(줄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춤 없이 벽돌만 쌓아 놓으면 무너지게 마련이다. 또한 사춤만으로는 담을 쌓을 수가 없다. 벽돌은 준비하지 않은 채 사춤만 강조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워낙 심각해 비록 그것이 집행을 담보하지는 않지만,돌파구 역할은 할 것이라는 점에서 산업평화선언을 할 수만 있다면 환영하는 바이다. 지금 이라크전쟁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편이다. 북핵문제 역시 외국인 투자심리를 위축시키고 있고,국제유가의 등락이 우리 경제를 불안케 하고 있으며,수출 차질은 심각한 지경이라고 한다. 실업률은 3.7%로 상승하고,무역수지는 두달째 적자를 기록하고 있으니 제2의 금융위기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국민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 가계든 기업이든 국가든 모든 살아 있는 시스템은 변해 가는 환경에 적응할 줄 모르면 생존할 수가 없다. '세계화라는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한국 노사관계의 패러다임이 변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지만,노사현장에서는 아직도 대립적이고,타협을 어용시하는 풍토가 만연하다. 노사관계의 국제경쟁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에 가깝다는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외국인의 투자기피는 물론 내국인 기업의 해외도피 또한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실업자의 양산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대량 실업사태를 공적자금 투여로 일시적으로는 막을 수 있겠지만 계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필경 국가 부도로 끝장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출범한 참여정부의 야심찬 노사통합 시대가 이라크전쟁 같은 외부요인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때 내부로나마 노사가 한마음이 되어 한시적으로 산업평화를 선포한다는 것이 어찌 국가이익만을 위해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것이 되겠는가. 국가적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득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한다. 전시엔 여야가 따로 없듯이 긴박한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는 노사간에도 웬만하면 서로 양보하고 훗날을 약속하는 것이 도리다. 구태여 먼 나라 사례를 인용할 필요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1995년 한국노총과 경총이 산업평화를 위한 공동선언을 함으로써 그 해의 노사분규건수를 반감할 수 있었다. 98년에는 노사정 대타협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대타협이 실효를 거둔 것은 그것이 법적 구속력을 가져서가 아니라,전 국민에게 주는 상징적 의미가 큰 것이고,이를 지켜본 국제평가기구들로부터 얻은 신인도 때문이다. 그 후의 금 모으기 운동도 그렇고,월드컵 경기를 통해 과시한 한국민의 역동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킬 때는 걷잡을 수 없는 활화산이 되어 독재정권도 무너뜨릴 수 있지만,그 힘이 생산적인 공동체의식으로 승화할 땐 세계를 놀라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이 바로 그 힘을 집결할 때다. '경제가 회복조짐이 보일 때까지'라는 불명확한 단어보다 좀더 분명한 용어로,가령 '앞으로 1백일' 또는 '이라크전쟁이 끝날 때까지'로 한정해 산업평화를 선언하되,현 수준 고용유지와 임금인상 요구 자제,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와 노조의 불법 과격시위 자제,산업안전에 대해서는 노사가 공동으로 책임진다는 것 등을 선언함으로써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새 노사관계의 패러다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기 바란다. 노사정위원회의 건설적 역할을 기대한다. sookim34@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