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자로서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미국의 대학자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인터뷰 섭외 하는데 몇개월이 걸리고,그렇게 공을 들여도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때때로 의외의 장소에서 힘안들이고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게 워싱턴 생활에서 맛볼 수 있는 지적 낭만 중 하나다. 1985년 노벨경제학상을 탄 노학자 프랑코 모딜리아니 MIT대 교수를 10일 만난 것도 그런 기쁨 중의 하나였다. 모딜리아니 교수는 이날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EPI)가 주최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회견 주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세금감면정책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10명을 포함,4백50명의 경제학자들이 감세정책에 반대하는 성명서에 서명했고,모딜리아니 교수는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과 함께 대표인사로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85세의 늙은 학자는 흐트러진 옷 매무새,지팡이를 들어야만 하는 불편한 걸음걸이만으로 보면 MIT의 고장인 보스턴에서 워싱턴으로 오는 게 쉽지 않았을 법했다. "이 늙은이가 워싱턴까지 와 감세정책 반대시위에 참여한 것은 그만큼 부시 대통령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세금감면은 부자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끔찍한 정책입니다. 미국경제에 심각한 재앙이 될 것입니다." 목소리가 퍼져 잘 들리지 않았지만 비난 수위를 높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스티글리츠 교수가 중간중간 거들어 줄 때마다 믿음직한 제자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스티글리츠는 그가 MIT에서 가르친 제자중 한명.스승과 제자가 부시 공격에 앞장선 셈이다. 이들은 회견이 끝난 후 EPI로 이동,회견에 참석지 못한 사람들과 전화 인터뷰를 갖고 마지막 분노를 토해냈다. 부시가 의회에 낸 감세안은 이라크 전쟁 승리에 도취됐다 경제를 추스르지 못해 재선에 실패했던 아버지 부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던진 승부수였다. 보스턴에서 온 노학자의 분노에서 부시의 승부수가 성공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워싱턴=고광철 특파원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