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안고 있는 심각한 병폐중 하나는 공공정책의 결정과정에 있습니다. 정치가 공공사업이란 이름 아래 경제적 타당성을 도외시한 채 국민의 혈세를 마구 뿌린 것이 오늘의 일본 경제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아오키 마사히코 일본 경제산업연구소 소장(65)의 진단은 명쾌했다. 일본 경제가 앓고 있는 중병의 근저에는 선심 행정과 낡은 정치가 원인으로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다. 정경유착이 일본 경제의 효율을 갉아먹은 또 다른 원인중 하나라고 강조한 그는 중앙정부의 간섭과 기능을 축소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의 책임과 자율성을 높이는 것만이 지금까지의 잘못을 바로 잡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변화에 대한 대응 속도가 늦은 것이 일본 경제의 최대 약점이라고 비판한 그는 스피드야말로 한국이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발휘한 저력중 가장 돋보이는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비공무원 조직 형태의 싱크 탱크로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경제산업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고 있는 그를 도쿄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 대담 = 양승득 < 도쿄 특파원 > ] ----------------------------------------------------------------- -일본의 고질적 병폐중 하나로 공공정책의 결정 프로세스를 꼽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공공사업에 무분별하게 돈을 쏟아부은 것이 옳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차량도 별로 다니지 않는 고속도로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공공사업은 중앙 정부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에 맡기고 지자체가 수익성을 따져 가며 책임을 지고 건설, 운영하도록 해야 합니다. 공공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혈세가 더 이상 마구잡이로 쓰이지 않게 하려면 정책 결정과정의 정보를 공개하고 시민들의 발언권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중앙정부의 쓸데없는 간섭과 무리한 예산집행에 반대하는 개혁파 지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다행이긴 합니다." -일각에서는 업계와 정치인들의 유착이 일본 경제의 효율을 왜곡시켰다는 주장도 적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정치인들이 업계의 로비에 넘어가고 국가 이익보다 지역구를 먼저 의식하는 경우가 생기다 보니 기존 도로와 평행으로 달리는 도로가 만들어지고 논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이 뚫리는 것입니다. 세금을 우선적으로 써야 할 다른 곳도 많은 판에 말입니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이런 낡은 스타일의 정치가 더 이상 반복돼서는 안됩니다. 스스로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얽혀 무분별하게 세금을 쓰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고이즈미 정권이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 깃발을 올리고 출범한지 2년이 다 돼 가지만 큰 성과는 없는 듯합니다. "사실 임기가 너무 짧은 것도 개혁이 삐걱거리는 큰 원인중 하나입니다. 개혁이야말로 총리가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각도 그렇고 은행 등 다른 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금 감면 등 세제개혁이 일본 정부의 핵심 과제중 하나로 부각돼 있습니다만 이 역시 총리를 보좌하는 경제재정자문회의가 책임을 지고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지지율이 취임 초보다 크게 떨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개혁 드라이브 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국민들은 지도자가 리더십을 분명히 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일본 경제의 내일을 낙관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근거는 무엇입니까? "일본 경제가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은 20세기 유산인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대립종식과 이로 인한 디플레 압력, 그리고 정보혁명의 급진전과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일본 경제의 견인차인 기업들의 강점은 정보를 동일한 조직내의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데 있습니다. 최고 경영자에서 하급 직원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공유하면서 더 큰 가치를 이끌어낸 것이 일본경제 발전 과정에서 한가지 원동력이 돼 왔습니다. 그러나 정보혁명의 급속한 확산은 이같은 강점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일본 기업들 특유의 강점이 빛을 잃은 것이지요. 하지만 산업 전체의 파워가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자동차산업만 보더라도 도요타,혼다는 차세대 기술경쟁에서 세계를 리드하고 있습니다. 철강도 강한 경쟁력을 되찾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외국뿐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도 일본경제 비관론이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비관론을 연령과 세대별 문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비관론은 현재 일본 사회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40대 후반~50대 초반의 세대를 중심으로 특히 넓게 확산돼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세대는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속승진의 기쁨과 버블의 단맛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같은 과거경험과 영 다른 상황, 다시 말해 구조조정과 감원, 감봉 바람이 휘몰아치다 보니 이들이 크게 충격을 받고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대가 저널리스트와 학자 집단에서도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감안하면 비관론은 확실히 부풀려져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40대 이하로만 내려가도 젊은이들 중에서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경쟁력 있는 사업 아이템 개발에 기꺼이 도전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일본은 쇠퇴의 길을 걷는 것만이 아니라 다양화되고 있는 중이라는 독특한 견해를 갖고 계신데요. "그렇습니다. 약하고 시대 변화에 도태된 기업이 있는가 하면 힘이 넘치고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기업도 적지 않게 혼재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석유화학과 섬유산업, 소매업의 예를 들더라도 우량기업이 있는가 하면 부실기업도 적지 않습니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2,3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기업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경쟁이 한창 진행중이라는 생각입니다." -정책결정 과정 등 제도적 측면 외에 일본 경제가 안고 있는 또 다른 고민을 한가지만 더 지적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고용의 유동성 문제입니다. 이에 관한 한 나는 40대 이하의 연령층에서는 별 걱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관료들 중에는 탄탄히 보장된 출세 길을 마다하고 벤처 기업인으로 변신하거나 다른 길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40대 중반이후의 사람들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새로운 길에 대한 의지와 도전의식이 약하고 불안감이 상대적으로 큽니다.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새로운 변화를 겁내지 않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각오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일본 처럼 민간기업의 체력이 떨어지고 대외 경쟁력이 약화됐을 때 정부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기업의 경쟁력이 후퇴한다는 것은 정부 입장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경쟁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정부가 직접 돈을 대주거나 정치권이 개입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민간기업이나 개인이 인센티브의 토대 위에서 경제활성화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기업을 도와주기 위한 세금 역시 인센티브 성격,다시 말해 투자활성화를 위한 법인세 감면 등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yangsd@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