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전 11시30분 서울 명동 은행회관 16층 회의실.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사 협회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수해복구 지원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긴급 소집한 간담회였다. 30분 늦은 정오에 회의장에 도착한 전 부총리는 비공개로 진행된 간담회에서 "태풍 '루사'로 피해를 입은 수재민들을 금융회사들이 나서 적극 도와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태풍피해 이후 각 금융사들은 금융지원 방안을 내놓고 자원봉사단을 파견하는 등 자발적으로 지원활동에 나선 터였다. 그런데 더 이상 무슨 지원을 하라는 얘기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회의에 배석한 재경부 관료는 "좀더 적극적인 지원을 당부한 것"이라고 말했다. 혹시 과거처럼 수재의연금이라도 할당한 것 아니냐는 물음엔 "지금이 '새마을 운동'하던 시절이냐"며 정색을 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날 오후 같은 장소에서 류시열 은행연합회장 주재로 14개 은행장 회의가 다시 소집됐다. 회의에선 은행권이 총 30억원의 수재의연금을 내기로 결정하고 은행별로 자산 규모 등에 따라 분담비율을 정했다. 국민은행은 4억2천만원,우리은행은 3억원 식의 배분액이 결정됐다. 정부가 금융협회장들에게 은밀히 방침을 전달하고 이어 금융사 대표들이 모여 일사불란하게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은 과거 '관치금융 시절'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은행 관계자는 "지난달 김해지역 수해때는 은행들이 각자 알아서 수재의연금을 내는 바람에 어떤 은행은 10억원을 내고 어떤 은행은 몇천만원을 내는 등 차이가 컸다"며 "은행간의 교통정리 차원에서 이번엔 정부가 나서 조정을 해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가 강력히 추진한 것중 하나가 '금융자율화'였다. 실제 은행권에선 자율화가 많이 진전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태풍 피해로 고생하는 수재민을 돕는 것 조차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하지 못하고 정부의 '관치'가 개입되는 모습은 우리 금융자율화의 현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했다. 지금이 정말 '새마을 운동'하던 시절도 아닌데 말이다. 차병석 금융팀 기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