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대의 에너지 거래기업이었던 엔론과,정보통신업계의 강자였던 월드컴은 15억달러와 58억달러에 달하는 분식회계가 드러난 뒤 각각 작년 12월과 금년 7월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을 대표하는 다수의 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해왔다는 의혹이 확산되면서 주가 폭락과 투자심리의 위축이 이어졌고,그 동안 세계 기업들의 경영 교범으로 여겨지던 미국식 경영방식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지난 10년간 호황을 누렸던 신경제의 성장이 주춤해진 점과,월스트리트자본주의의 지나친 확산이라는 환경적인 요인에 더하여 기업회계기준의 미비,감사인의 독립성 상실,과다한 스톡옵션으로 말미암은 CEO들의 당기 성과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도덕적 해이 등이 소위 '엔론사태'로 불거진 미국식 경영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거대기업이 이렇게 몰락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CEO에 대한 견제장치의 마비에 있다. 우리나라 IMF 외환위기의 원인(遠因)이 '오너 독재'체제가 빚어낸 모험경영에 있었다면,미국 엔론사태의 출발점은 'CEO 독재'체제가 빚어낸 견제와 균형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경제의 성공에는 공정한 경쟁이 필수적인 요소이며,조직경영의 장기적인 성공에도 권한 독점이나 CEO의 독재 독주 독선은 금물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이 쟁점이 되고 있으며,제왕적 총재에 대한 비난 역시 엄청났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경우 당의 운영권이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 간에 분점 된 후에는 신기할 정도로 내부 불만이 없어졌다는 점을 눈여겨 볼 만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는 서구식 기업지배구조의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미국 기업 역시 사외이사(정확한 용어는 independent director로서 독립이사다)의 선임에 CEO의 영향력이 커서 이사회의 감시·견제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 기업의 CEO에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막강한 권한이 부여된다. 그 점이 문제가 된 것이다. CEO 독재체제가 되어 경영권을 독점한다는 것은 경영정보의 독점,의사결정과 집행권의 독점,견제장치의 부재 현상을 의미하며,그 결과 CEO의 도덕적 해이가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구조상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금 미국에서는 회계개혁법안의 제정,스톡옵션을 비용 처리하는 기업의 증가,CEO 보상체계의 재평가 등의 조치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한 우리 기업의 대응전략은 한마디로 미국식 경영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보완해 한국형 경영,한국형 기업지배구조의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기업 경영의 성공에는 CEO의 강력한 리더십이 절대적인 요소다. 그래서 탁월한 경영성과를 일구어 낼 수 있는 CEO를 찾는 것은 모든 기업의 절체절명의 과제이지만,동시에 CEO가 장기적으로 성공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견제·감시·평가 장치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형 기업지배구조 역시 경영목표는 분명히 부여하되 경영수단은 CEO에게 전적으로 맡기고,실적에 대한 평가를 엄격히 유지하는,절제된 자율·지도된 자율(guided autonomy)을 기본적인 틀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와 같은 소유구조 하에서는 감시·평가 기능을 독립적이고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들이 중심이 된 이사회와 대주주가 공동으로 맡아 경영자 CEO들에 대한 공정한 감시자·조언자·평가자의 역할을 하는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사외이사나 대주주인 오너들이 경영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독립성과 윤리성을 갖추지 못하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사외이사제도의 도입 자체에만 급급했고,또 제도만 도입되면 의도한 목표가 달성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해왔지만,무능한 이사회는 없는 것만 못한 경우가 많다. 이사의 역할과 자세,전문지식과 이사회 운영에 대한 권위 있는 교육서비스를 제공할 기관의 출현이 기다려지는 시점이다. ilsupkim@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