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별세한 이주일(62ㆍ본명 鄭周逸)씨는 지난30여년간 대중을 웃기고 울렸던 대표적인 코미디언이자 한국 코미디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1980년 이씨는 구봉서ㆍ곽규석ㆍ배삼룡ㆍ이기동 등 기라성 같은 코미디언이 군웅할거하는 한국 코미디계에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유행어와 함께 혜성처럼 등장했다. 자그마한 키에 거무튀튀하고 주름많은 얼굴, 벗겨진 대머리에 더부룩한 수염자국, 야트막한 코. "무명 시절에는 얼굴이 쥐어뜯고 싶도록 미웠다"고 술회했던 이씨는 그런 외모를 오히려 전매특허로 만들면서 대중들에게 이름 석자를 각인시켰다. 이주일씨의 인기를 사회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삐딱한 광대-이주일論」(1987년이영수ㆍ박성태 공저)는 "특유의 못생긴 얼굴과 우스꽝스런 몸짓은 당시 `80년의 봄'이라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그 누구도 잘나지 못한 우리 대중들의 모습을 대신 비추어주는 듯한 친근미를 갖게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씨는 동시대 코미디언들이 서서히 잊혀질 때 매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해 사람들의 뇌리 속에 머물렀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 라는 유행어와 함께 `수지큐' 노래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뒤뚱뒤뚱 걷는 `오리춤'은 후배 코미디언들이 두고두고따라할 정도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코미디 황제'의 왕좌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노력이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코미디 공부를 하고 돌아왔는가 하면 개인 스크립터를 고용하기도 했다. 85년 소재 빈곤 등으로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제2의 도약'을 위해 등록금 전액을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대학생 개인스크립터를공개 모집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오랜 무명시절을 거쳐 연예계에 입문, 코미디언으로서당대 최고 인기를 누렸는가하면 돌연 정치인으로 변신해 숱한 화제를 뿌렸다. 올 초에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도 `금연홍보대사'로 나서는 투혼을 발휘했고,휠체어와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면서도 월드컵 기간 경기장을 직접 찾아 한국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인은 1940년 북한 강원도 고성군의 한 선비 집안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1948년 월남한 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의 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리면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시절부터 축구부에서 활약하면서 뛰어난 운동 실력을발휘하던 그는 춘천고 축구부에서 동급생이던 박종환(朴鍾煥ㆍ65ㆍ여자축구연맹 회장)감독을 만나 각별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무렵 박감독과 함께 당시 축구명문이던 신흥대(현 경희대)에 나란히합격하지만 이씨가 입학금을 노름판에서 날린 뒤 군에 자원입대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씨는 이후 군대에서 `끼'를 발휘하면서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씨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숱한 수모와 역경을 겪으면서 20여년 가까이지방 쇼단 MC와 서울 변두리 극장 무대를 전전하는 무명 시절을 거쳐야 했다. 71년 베트남 파월 장병 위문공연 길에 오르면서 `웃기는 코미디언'으로 조금씩이름을 알렸고, 당시 최고 스타였던 가수 하춘화쇼의 단골 사회자가 돼 지방공연을따라다니기도 했다. 하씨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77년 이리역 폭발 사고에서 이씨가 하씨를 등에 업고 폭발현장에서 구해낸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이후 마흔살이 되던 해인 79년 MBC 「웃으면 복이와요」로 비로소 TV에 데뷔했지만 못생긴 외모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기회는 곧 다시 왔다. 80년 1월 19일에 방송된 TBC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우연찮게 이름을 알렸던 것. "윤수일씨가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나와서 타잔놀이를 하고 있는데 전 그옆에 대사 한마디 없이 서 있는 엑스트라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TV에 나가게 돼서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타잔이 줄을 타고 연못 위를 지나가게 됐는데, 조연출자가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큐!' 한단 말예요. 난 `큐'를처음 받아 봐서 날 보고 이리 오라는 줄 알고 그쪽으로 가다가 줄타고 내려오던 타잔하고 부딪쳐 연못 속에 빠지고 말았어요. 실수로 물 속에 빠졌다가 당황하고 얼굴을 드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제가 스타가 된 것은 순전히 실수였습니다." 훗날 이씨는 자신의 데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씨는 이주일 만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그의 예명은 `이주일'이 됐다. 이후 탄탄대로를 달리는가 싶더니 80년 8월 연예인 숙정작업과 함께 코미디언배삼룡, 가수 나훈아, 탤런트 허진 등과 함께 `저질' 연예인으로 낙인찍혀 하루 아침에 방송사에서 쫓겨나는 불운을 맞았다. 그러나 이듬해 "뭔가 보여주겠습니다"라는 유행어와 함께 브라운관에 다시 복귀하고 유흥업소에서 `밤무대의 황제'로 떠올랐다. 서슬 퍼렇던 시절, 그는 밤무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를 코미디의 소재로 삼으면서 대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도 했다. 그런 그를 하늘이 시기하기라도 한 걸까. 91년 11월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28살의 큰아들 창원(昌元)을 교통사고로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맛봐야 했다. 그의 인생행로가 정치 쪽으로 방향을 튼 것도 이 무렵.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이씨는 평소 친분이 있던 고(故)정주영 회장의 권유로 우여곡절 끝에 92년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의 공천을 받아 경기 구리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씨는 "정책을 연구할 시간에경조사에 불려 다녀야 했다"면서 "4년 동안 코미디 잘 배우고 갑니다"라는 유명한말을 남기고 코미디언으로 복귀,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굴곡 많던 그의 인생은 올한해 극에 달했다. 평소 건강했던 그는 지난해 10월 말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힘겹게 투병하면서도 `금연홍보대사'로 나섰던 것. 평생 남을 웃기며 살아온 그가 병상에서 거친 숨을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고 `이주일 신드롬'과함께 금연 열풍이 불어닥쳤다. 한번도 은퇴를 선언한 적이 없었던 그는 아픈 육신마저도 대중을 위해 쓴 천상 코미디언이었다.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fusionj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