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무역 센터가 무너졌지만 뉴욕 증시는 붕괴되지 않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개장 전 전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고 인텔, 시스코 등 대기업은 앞다투어 자사주 매입 의지를 표명했다. 월요일 뉴욕증시는 다우와 나스닥이 각각 7%와 6% 가량 급락했으나 '성공적인 폭락'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 증시를 수렁에서 건져내는 데 일조했다. ◆ 변동성, 인내심 필요 = 당분간 국내외 증시는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대결 구도 진행에 따라 일희일비를 반복할 전망이다. 문제는 예단하기가 쉽지 않은 데 있다. 저마다 나름의 시나리오를 들고 분주히 득실을 계산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일쑤다. 이번 사태가 단기간에 마무리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분간 좀 더 지켜보는 인내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잔잔히 흐르다 뜻하지 않은 소식에 급등락하는 장세에 빠져들기보다는 한발짝 떨어져서 관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미국테러 사태는 동반 금리인하 등으로 어느 정도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테러에 대한 불안감은 그러나 전쟁으로 옮아가며 우려를 더하고 있다. 또 이번 사건이 여전히 불확실성에 가려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진행중임을 감안할 때 향후 미국이 본격적인 '액션'을 취하기 전까진 국내외 증시는 시차를 두고 극심한 눈치보기가 이어질 공산이 크다. 해프닝으로 끝난 탈레반의 '성전' 선포 보도는 미세한 충격에도 방어태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금융시장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날 오후 탈레반이 미국을 향해 성전을 선포했다는 소식에 일부 아시아 증시가 하락 반전했고 나스닥선물지수는 상승분을 덜어내고 보합으로 되밀렸다. 미국 및 유럽 채권가격도 요동쳤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이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사흘이라는 구체적인 인도 시한을 제시했다. 그러나 기한을 하루 앞두고 아프칸의 탈레반은 제재해제, 반군지원 중단 등 네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 협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장기전'이 예상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발생한 것이다. 서울증권 권혁준 연구원은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있으나 이번 사태가 단기간에 마무리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미국의 폭격이 진행될 것으로 관측돼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추가 충격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권 연구원은 "500선이 강력한 저항선으로 작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날 급등으로 가격 메리트는 감소했다"며 "기간보유 위험이 큰 만큼 보수적인 시황관을 유지할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주도주도 없고 외국인이 매도관점을 유도하고 있는 가운데 심리적인 동요에 따라 심하게 좌우되는 개인 매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 애국심 주가, 어디까지 = 닷새만에 개장한 뉴욕 증시는 테러 여진을 수습하며 연착륙에 성공했다. 테러로 상처받은 자존심을 만회하려는 듯 투자자들은 지속적으로 매수주문을 넣었다.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자사주 매입 제한을 완화했고, 대기업은 이에 화답하며 잇따라 주식 매입 계획을 발표했다. 서방 국가들이 마치 약속한 것처럼 나란히 금리를 낮추며 매수세를 뒷받침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이어 유럽중앙은행(ECB)이 기준금리를 같은 폭 인하했다. 스위스, 캐나다 등도 금리인하 대열에 동참했다. 그러나 테러 충격 이후 쌓인 매물을 걷어가는 데 그쳤다. 주요 지수는 일각에서 우려된 것과 달리 최악은 비켜섰지만 사상 최다 거래 속에 급락했다. '바이 아메리카'가 불안감을 뚫고 나갈 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테러 사건이 소비 심리를 위축, 경기를 악화시킨다는 전망이 많다. 이번주 재개되는 3/4분기 기업 실적 전망도 테러로 인해 바닥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낼 것으로 관측된다. ◆ 독자행동, 다시 한번 = 이날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16.17포인트, 3.45% 높은 484.93에 거래를 마감하며 단기 심리선인 5일 이동평균선을 회복했다. 종합지수는 장 막판 상승폭을 내주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상승폭을 확대했다. 급변하는 해외 정세 속에 주식을 보유하고 잠자리에 들기가 무서운 심리가 지배하는 장세에서 다소 의외의 결과다. 장막판 대우차 매각이 사실상 타결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매수세를 자극한 데 힘입었다. 정부 관계자는 "GM과 대우차 매각협상이 끝났다"며 "채권단과 GM은 오는 21일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평공장은 위탁공급 방식으로 처리되며 매각대금은 10억달러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테러 이후 투매를 일삼던 개인은 이날 매수 주체로 돌변, 1,500억원 어치 이상을 순매수하면서 상승세를 굳혔다. 주식 매도를 자제하고 순매도 기조를 유지하겠다던 기관이 347억원을 순매도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날 개인 매수세는 심리적인 측면이 강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저변에는 풍부한 고객예탁금이脂?있다. 고객예탁금은 미국 테러 하루전인 지난 11일 7조5,842억원 수준에 머물렀으나 지난 17일 현재 8조5,000억원으로 1조원 가량 증가했다. 투매로 인한 주식매도 자금 유입이 대부분이지만 증시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신규 자금 유입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고객예탁금은 대부분 증시에 후행하는 경우가 많아 당장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다만 주식 매도 자금이 증시를 떠나지 않고 잠재 주식매수 자금으로 볼 수 있는 고객예탁금이 증가 추세를 지속할 경우 안전판 역할이 기대된다. 대신증권 나민호 투자정보팀장은 "전쟁이 크게 확산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대우차 매각 임박 등 미국 테러에 묻혀졌던 호재가 하나둘 드러나고 고객예탁금 증가 등 수급이 뒷받침해주면 시세 탄력이 좀 더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당사자격인 미국이 7%대 하락한 데 비해 국내 증시가 과민 반응한 측면이 있으므로 회복 과정을 거칠 것이란 얘기다. 한경닷컴 유용석기자 ja-j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