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 < 시인. 마음산책 주간 >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가 했다는 탄식, "구질서는 무너졌는데 새로운 질서,새로운 철학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말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새로운 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식과 철학이 필요한데 불행히도 그것은 아직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다. 뭐,'새로운 철학'이라는 거창한 표현까지도 필요 없다. 차분히 자신의 주위를 살펴볼 시간적 공간적인 여유를 너무나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켜갈 최소한의 내밀한 공간을 마음의 안팎에 가져볼 수 있는 한줌의 인식,바로 그것이 철학인 것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모가 죽은 자식의 몸에서 얻은 세포로 아들을 복제해 달라고 의학자들에게 요청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이럴 경우 그렇게 태어난 아들은 죽은 아들로 봐야 할 것인지,새로운 아들로 봐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듯 첨단의료 과학시대는 인간성,인간의 몸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새벽녘에 어쩌다 잠이 깨어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가 얼마만큼 소음 속에 둘러싸여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서울의 밤 하늘에서는 별을 보기가 어렵고,또 고요 속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온전한 시간을 갖기는 더 어렵다. 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대기권 밖에서 천체를 조망할 망원경을 설치했다지만, 별을 보는 행위를 그저 자연과학적인 시각만으로 볼 것인가? 어릴 적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꿈을 키웠고,또 별자리를 찾느라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적이 있었다. 만일 밤하늘에서 별을 볼 수 없다면 그 삶은 그만큼 더 조악해진 것이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우리는 에어컨을 켜느라 그 소음을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들에게 별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는 불행하다. 삶의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는 지적은 그것 자체로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말이고,또 이런 지적만으로 우리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 바꾸지 않으면 관성이 붙은 삶이 저절로 달라질 리 만무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큰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가장 작은 실천에서부터 비롯돼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것을 상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그것은 삶에는 마땅히 변화해야 할 것이 있고,또 절대로 어떤 환경에서도 지켜 나가야 할 것이 있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가령 삶에는 구원(久遠)한 것들,생로병사의 인간의 법칙들,시간의 방향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또 삶에는 불가해한 어떤 차원이 있다는 것 등등은 우리를 묶고 있는 끊을 수 없는 인과의 사슬이다. 마음의 고요를 불러들임으로써 우리는 삶의 깊은 차원에 대해 눈떠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기초케 하는 어떤 힘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방법론으로 책읽기를 들고 싶다. 그것도 온갖 소음 속에서 어떤 정보만 얻으려고 하는 속성의 책읽기가 아니라,조용히 자신과 대면하는 책읽기가 그것이다. 가령 당장 이번 휴가 때 책과 동반해 보면 어떨까? 어떤 문학평론가는 책읽기 내용은 책의 권수와도 무관하다는 주장을 한다. 중요한 것은 책에 몰입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 연장에서 그는 한평생 성경을 본 사람은 한권의 책만 본 것이 아니라 수백권의,볼 때마다 깊이가 다른 성경을 본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책을 소장하는 것의 의미와 한권의 책이라도 정성으로 몰입해서 읽는 것은 후자의 경우가 그 의미가 더 무겁고 더 크다. 그러므로 우리를 감동케 하는 한권의 책과 동반한다는 것은 곤곤한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할 수 있는 첩경이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하는 이런 고민은 형태는 조금 다를지라도 인류가 오래 전부터 했던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우리는 책 속에서 그 해법을 감지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마음의 고요를 불러오는 책읽기는 그 실천이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도 널리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더 큰 즐거움과 유익함으로 우리를 충전케 하리라. 그 행위는 나약하지 않고 삶을 적극적으로 되살리는 강한 에너지로 우리에게 돌아오리라. suk@maum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