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장편소설 "오디세이아 서울"에서 한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경기고등학교를 말해야 하는 필요성을 터보기로 하자.

"한 여사는 그 학교 동창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녀들은 이미 <여고(女高)>였던 시절에 다녀 놓고도 굳이 모교를 <고녀(高女)>로 불러 <뺑뺑이 돌려 들어온 어중이 떠중이> 후배들과 <치열한 경쟁을 당당히 치러 이긴> 자신들을 구분하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녀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특히 자기들 또래의 여자를 재는 자는 특이했다.

무엇을 얼마나 공부했느냐는 물론 아니었다.

그녀들의 일차적인 기준은 평가할 상대편 여자가 나온 고등학교였다.

상당히 알려진 여류학자라도 출신여고가 자기들과 다르면 그 순간에<돈으로 우겨 학위나 딴 돌대가리>로 판정이 났다"

과거 경기고등학교는 초일류였다.

그 학교는 화동 1번지에 있었다.

1976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그곳은 초일류의 상징으로서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경기고 출신들은 발군의 업적과 명성을 쌓아간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를 학벌 위주의 사회, 학연으로 이끈 장본인으로 매도당하는 일순위였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양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일이다.

그들이 몰려 다니며 이 나라를 농단했다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기 출신들이 각성하여 각별 근신할 일이다.

이곳 터 역시 운현궁과 마찬가지로 경복궁 주맥과 창덕궁 주맥 사이에 위치해 있으니 그 성격은 운현궁의 그것과 비슷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이 보다 북쪽으로 산에 치우친 까닭에 수(水)의 기운보다는 금(金) 기운에 더 가깝다는 차이점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그래서인가, 경기 출신들이 그 과실을 얻기에 급한 나머지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의식이 결여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왜냐하면 수는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봄을 기다리는 오행상의 해석이 가능하지만 금은 이제 결실을 얻고 딱딱한 껍데기에 갇혀 모진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 나가려는 이기심이 역시 오행 해석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기 출신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사실 매우 가혹한 편이다.

여러가지 지적이 있겠지만 좀 정리하자면 다음 세 가지가 아닐까 한다.

즉 배타주의와 개인주의와 선민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성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즉 배타적이라 하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서로를 밀어주고 봐주는 측면이랄 수 있는데 거기에 개인주의적이란 평가가 첨부되면 서로 모순이 되기에 해 본 말이다.

과연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아니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 평가가 될까?

당연히 양쪽 다이다.

왜냐하면 경기고 출신이 아니면 배타주의가 곧 경기 출신들의 이기주의적 맥락에 닿게 되는 까닭이다.

이제 고백하지만 나 자신이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 강하게 그들을 비난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지레 짐작하며 이 글을 쓴다는 점을 독자께서는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경기고를 졸업했지만 경기중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다.

나 같은 동기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이 처한 처지에 따라 여러 행태가 있었지만 나는 극단적인 괴리감을 지니고 고등학교를 다녔던 경험이 있다.

즉 경기고를 다니면서 경기중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우월감과 열등감의 상극적 대비를 마음속에 심어 준 요인이 되었기에 지적한 말이다.

게다가 나같은 경우의 동창들은 지방 출신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상대적 열등감은 신경을 쇠약케 만들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달하기도 한 현상이었다.

나는 경기를 들어감으로써 사실상 풍수를 만나게 되는 이상한 인연의 소유자다.

그 이전 어릴 때부터 막연한 산 너머 마을에 대한 동경심 때문에 무작정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닌 경험 또한 풍수에 가깝게 다가들게 한 원인이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경기고라는 특수한 사정이 나를 그 길로 끌어들이게 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은 것이다.

우리집은 과수원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선친께서는 아무런 사회적 지명도가 없었던 분이다.

그저 농사꾼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당신의 그런 인간된 도리가 내게 얼마나 고마웠던 일인지를 잘 알고 있지만 불행히도 그 때는 그렇지가 못했다.

못된 소 엉덩이에 뿔난다고 나는 당시 아버님의 그런 위상을 몹시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모두들 많이 배우고 유명한 잘난 부모를 두고 있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내놓을 게 없는가 하는 멍청한 생각이 그런 식으로 마음을 먹게 한 것이리라.

여하튼 그런 분위기에서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찾은 것이 술과 망우리 공동묘지였다.

묘지는 평등의 표본이었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죽어서는 그저 범부와 별 다를 바 없는 몇 평 땅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심리적인 안정감 같은 것.

하지만 이제는 안다.

죽음에도 그리고 주검에도 계급이 있다는 것을.

이미 국립묘지 산책에서 소개한 것처럼 죽음에는 국장이니 사회장이니 그도 아니면 수많은 조화에 둘려싸인 굉장한 것이 있는가 하면,산동네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 시신 하나 거둘 돈이 없어 상주가 자취를 감추는 일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구청인가 어디서 화장 처리를 해준다는데 그 상주는 숨어서 그 모습을 훔쳐보며 눈물 짓는다.

어찌 죽음에 계급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주검 또한 다르지 않다.

거대한 호화분묘에 묻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잡초가 무성한 폐총(廢塚)에서 시신이나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지 모를 무덤도 숱하게 많은게 현실 아닌가?

이 또한 주검의 계층성을 웅변하고 있는 대목이다.

경기 교지 통권 제45호에서 당시 교장의 권두언에는 이런 말이 들어가 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학교를 우러러 보고 있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말하며 제군들이 우수한 학생들인 때문이다. 경기라는 이름은 곧 수재들이 모인 학원의 대명사처럼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제군들의 대부분은 국민학교나 중학교의 우등생이었고 격심한 입시 경쟁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입학에 성공하였으며 제군들의 지능지수는 전교 평균이 133에서 135에 이르고 있다"

낯 간지러운 이 대목을 인용하는 까닭은 나 자신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능이 얼마나 되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게다가 국민학교나 중학교 때 우등을 해본 적도, 반장이나 부반장을 해본 적도 없다.

나는 그 때 5년제였던 경기공업전문학교를 가려다가 우여곡절 끝에 불합격하기를 바라며 경기에 응시했고 그저 우연히 합격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경기라는 학교를 매우 복잡한 구성원과 성격의 배움터였다는 생각을 변함없이 가지고 있다.

어찌 되었거나 나 같은 사람도 경기고 출신이니 말이다.

[ 본사 객원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