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대척점(對蹠點)에 위치한 한국과 아르헨티나만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도 흔치 않지만 처해있는 여건이 두 나라만큼 닮은 꼴인 나라 또한 흔치 않다.

최근 아르헨티나의 실상을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반세기 전 이탈리아,스페인,그리고 다른 유럽을 떠나 광활한 팜파초원에 대한 희망과 꿈을 안고 아르헨티나를 찾았던 유럽사람들이 이제 ''역(逆)이민 짐''을 싸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를 반영하듯 올 상반기동안 이탈리아대사관이 아르헨티나인들에게 내준 여권은 무려 7천장.이는 지난해 1년간 발행된 숫자와 같다.

이같은 ''탈(脫)아르헨티나 물결''은 스페인대사관과 미국대사관 창구에서도 마찬가지라는게 뉴욕타임스의 설명이다.

"이민이나 가야겠다"는 국민이 부쩍 늘고 있다는 한국으로부터의 소식과 너무나 흡사하다.

아르헨티나의 실업률은 원래부터 높았다.

하지만 지난해 14%에 머물던 실업률은 올들어 더 심각해져 현재 16%까지 올라갔다.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들의 자살,마약중독,그리고 가정폭력은 치유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병원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의사진찰을 기다리는 환자의 줄이 날로 길어져 언제 치료를 받을지 모르는 실정이라는 소식이다.

급증하는 실업자로 인한 사회불안에다 끊임없는 의약분업마찰까지 겪고있는 우리 실정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것 같다.

북반구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도 크리스마스시즌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소비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아파트값은 최근 수개월사이 10%이상 떨어졌으며 백화점매출도 작년에 비해 14%나 줄었다.

호주머니가 빈약해진 소비자들은 샴푸나 면도용 거품비누대신 세숫비누를 쓰고 있다.

시장은 시장대로 값싼 브라질상품이 판을 친다.

인접 볼리비아 페루 등의 저임 노동자들이 아르헨티나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

한국 노조들이 대대적인 총파업을 선언하고 있는 가운데 1천4백만명의 아르헨티나 근로자중 7백만명이 가입해 있는 아르헨티나노조들은 이미 지난 23일 36시간의 총파업을 실시했다.

2주전 정부가 발표한 재정및 연금 조세개혁에 반대하는 총파업이었다.

농산물값 회복에 회의적인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있으며 일부 근로자들은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타이어를 불태우며 자기들이 다니는 설탕공장을 국유화하도록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도 우리나라 농민들이 벌인 시위와 너무나 비슷하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경제상황은 만신창이 그 자체다.

작년에 마이너스 3%의 성장률을 기록했던 경제는 올해도 1%미만의 성장에 그칠 것으로 보이며 내년 경기는 올해보다 더 못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이다.

정치권은 부패했고 경제를 관리할 능력을 상실한지 오래다.

도덕적 기초가 무너졌기때문이다.

카를로스 메넴 정부를 이어받은 페르난도 루아 현정부는 일자리창출과 부패척결을 외쳤지만 하나도 이뤄진 것이 없다.

상원의원들이 연루된 뇌물사건은 부통령의 사임을 불러왔고 개각이 단행된 이후 현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조사결과는 국민의 72%가 현정부에 비판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국민들이 1983년 오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들어선 민간정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뉴욕타임스의 지적이다.

"차라리 과거 군사독재정권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도덕적 근거를 상실한 우리나라 정치권이 아르헨티나를 반면교사로 받아들여야할 가장 중요한 측면은 바로 이 대목이다.

양봉진 워싱턴 특파원 yangbong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