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논리에 매달려...재계 목소리엔 딴청 ]

"산자부가 힘이 없어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지난달 17일 저녁 서울 플라자호텔 중식당 도원에서 열린 산자부 1급이상 간부와 대한상의 신임 회장단과의 상견례 자리에 김영호 산자부 장관은 앉자마자 죄송하다는 말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외환위기이후 산업정책의 주무부처인 산업자원부는 금융논리에 입각한 구조조정론자들이 주도하는 경제팀에서 거의 "왕따" 당하다시피 하고 있다.

산자부 직원들은 흔히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을 "빅4" 또는 "딴 동네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대부분 과거 재정경제원 시절 한솥밥을 먹던 식구들.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교통정리를 한다지만 주로 거시경제만 들여다보는 재경관료 출신이기는 마찬가지.

이들을 상대로 교수출신 김영호 산자부 장관으로선 역부족일수밖에 없다.

실물경제통인 박태준 전 국무총리 시절엔 박 전 총리가 산업정책을 이해하면서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정치인 출신 이한동 총리가 들어서면서 이 역할마저 실종됐다.

법무부가 지난 21일 내놓은 "기업지배구조개선 권고안"도 경영현실에 무감각한 정부의 정책시각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재계는 비판한다.

모 대기업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변호사와 회계사 위주로 구성된 세종법무법인이 만든 권고안은 한국의 기업 현실을 전혀 무시한 채 선진 각국의 이 제도 저 제도를 뽑아내 섞은 것"이라고 혹평했다.

그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계열사 등 대규모 이해관계자와의 거래시 이해가 없는 주주 승인을 받도록 했는데 계열사와 거래할 때마다 주총을 일일이 열어야 하는게 말이 되느냐며 흥분했다.

재계는 외환위기 이후 채권금융기관들이 부실채권 회수차원에서 기업구조조조정을 좌지우지하면서 산업정책이 완전히 실종됐다고 본다.

정갑영 연세대 교수는 "한때 국내차시장의 30%를 차지했던 대우자동차의 처리만 하더라도 한국차산업의 장기비전도 마련하지 않고 "한푼이라도 많이 주면 얼른 팔아치운다"는 채권단의 금융논리로만 일관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제조업의 근간인 자동차산업 구조를 뒤바꾸는 작업이 진행중인데도 주무부처인 산업자원부는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재경부와 채권단만 큰 소리를 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거시정책 차원에서 미래지향적인 산업정책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재정금융부처는 산업정책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전자상거래 기반 조성, 연구개발(R&D) 투자와 기술개발 인력양성 같은 과제엔 뒷짐을 지고 있다.

박중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구조조정은 부실을 덜어내 재무구조를 건전화하는 수술요법과 핵심역량 집중및 네트워크 극대화로 살을 찌우는 회복법 등 두 방법으로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며 "그런데도 정부 정책은 오로지 수술에만 매달리는 바람에 금융시장이 얼어붙어 실물경제와 금융이 악순환을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정책이 경제정책 결정과정에서 "왕따" 당하는 데는 업계의 책임도 일부 있다고 산자부 관료들은 지적했다.

제조업체들이 당장 칼자루를 쥔 금감위나 공정위를 찾아다니느라고 산자부는 거뜰떠 보지도 않고 있다는 얘기다.

정구학 기자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