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조와 함께 프랑스의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온 르노는 올해로 창립 1백1년을 맞는다.

창업자인 루이 르노는 1877년 포목상과 단추공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의 6남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기계 만지기를 좋아했던 루이는 열 세살 때 처음 자동차를 보았다.

루이는 1898년 제대하자마자 "드디옹"의 세바퀴 자동차를 샀다.

루이는 이 차에 장착된 1기통 3백73cc 1.75마력의 미니 엔진을 바탕으로 현대식 네바퀴 차를 만들었다.

최고시속 32km의 르노 1호차가 탄생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모인 친구들로부터 12대의 판매예약을 받고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1899년 2월 4만프랑의 자본으로 르노형제회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열린 파리 오토살롱에 르노 1호를 발표,60대의 주문을 받았다.

엔지니어로서뿐만 아니라 뛰어난 레이서이기도 했던 르노 형제는 1902년 파리-빈 레이스에 3천7백cc 70마력 파나르를 물리쳐 큰 화제를 모았다.

이를 기점으로 르노는 6백여명의 종업원으로 3천대의 차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파리-마드리드 경주에 참가했던 루이의 형 마르셀은 앞차 먼지에 가려 언덕에서 굴러 목숨을 잃었다.

자동차 역사상 가장 처참한 레이스의 하나로 기록된 이날 모두 10명이 목숨을 잃어 프랑스 정부는 레이스 중단조치를 내리기에 이른다.

초창기 르노는 다른 메이커와 마찬가지로 엔진과 샤시를 따로 사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차를 만들었으나 1905년 독자적으로 2기통 엔진개발에 성공했다.

파리역 마차회사는 1천2백5cc 8마력 엔진으로 시속 60km를 내는 르노택시 1천5백대를 주문했다.

이 차가 1차대전 때 군인들을 전선으로 실어날라 유명해진 "마르느의 택시"다.

1913년 르노의 빌랭쿠르 공장은 3천9백36명의 종업원으로 프랑스차 생산의 20%인 1만대의 차를 생산했다.

1차 대전은 르노에게 좋은 기회였다.

항공기 엔진과 탱크 등 군수용품을 생산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전쟁후 르노는 소형차에서 고급 대형차까지 생산하는 프랑스 최대의 메이커로 올라섰다.

르노는 2차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공장이 거의 파괴되자 재기를 위해 독일 점령군을 위한 트럭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1944년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이 마감된 후 전범으로 몰리는 결과를 낳았다.

구금상태에서 루이의 병은 악화되었고 가족의 품에 돌아왔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으며 르노는 6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레지스탕스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45년 1월 르노를 국유화한다고 발표했다.

생전에 루이와 절친했던 프랑스 문호 앙드레 말로는 그를 가르켜 "시인의 얼굴을 가진 자동차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손을래 < 수입 자동차 협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