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부품업체인 S사의 K사장.

그는 요즘 신문 보기가 겁난다.

언론을 통해 회사가 알려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긴 하지만 생각지도 않던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부작용은 바로 국내 기업끼리 벌이는 "진흙탕"경쟁.

"신문 보도가 나간 뒤 며칠이 지나면 해외지사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오곤 합니다. 클라이언트들은 계약을 재검토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 일쑵니다. 알고 보니 국내 경쟁기업들이 더 낮은 가격에 물건을 주겠다고 훼방을 놓은 것이지요. 미국 D사와의 계약건에는 무려 6개 국내 기업이 달라붙었다는 보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는 최근 임직원들에게 회사와 관련된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을 엄명해 놓은 상태다.

코스닥 등록기업의 의무 사항인 수출,투자,신사업진출 등의 공시도 가급적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

특히 수출 계약에선 거래 당사자인 외국기업의 이름을 밝히길 꺼린다.

정보통신기기를 생산하는 벤처기업인 T사의 L사장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후 그는 "장기 해외출장"이란 방법으로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비서들은 "현지 상황이 워낙 유동적이어서 사장님의 정확한 귀국 날짜를 알 수 없다"고 얼버무린다.

그러나 그는 아침 6시면 어김없이 회사에 출근한다.

거짓말까지 하며 피해 다니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기자들을 만나면 회사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L사장은 불가피하게 "출장중"인 셈이다.

"외국업체와 경쟁하기도 바쁜데 국내 기업끼리 서로 발목을 잡다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내수 시장이 포화단계에 이른 일부 업종의 경우 한 업체가 조건을 내걸면 다른 업체가 끼여들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식의 "제 살 깎아먹기"경쟁이 극성을 부립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회사의 내용을 알릴 수 있겠습니다. 영업까지 희생해가면서 회사의 지명도를 높일 수 없습니다"

벤처 및 중소기업의 "이유"있는 언론 기피증.

아직까지는 일부 업종에 한정되고 있긴 하지만 그 수준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취약한 영업망을 만회하기 위해 경쟁 기업의 영역을 파고 드는 행위는 분명 상도의에도 어긋난다.

설혹 그런 방법으로 많은 이익을 올려도 기반이 튼튼하지 못해 사상누각에 그칠 공산이 크다.

단번에 뭔가를 이루겠다는 일부 기업의 이런 조급함이 걱정스럽다.

김태철 벤처중기부 기자 synergy@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