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 < 과학문화연 소장 >

최근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렸던 제7차 세계 기호학 대회의 주제는
"복잡계에서의 기호과정"이었다.

복잡계에 대해 다양한 기호학적 견해들이 선보인 가운데 카오스를 기호학의
새로운 도전 대상으로 꼽은 학자도 있었으며 일리야 프리고기네에 대한 높은
평가도 빠뜨리지 않았다.

움베르토 에코 등 쟁쟁한 인문학자들이 복잡성 과학에 관심을 표명한
이례적인 자리였다.

복잡성 과학의 연구 대상은 복잡계이다.

사람의 뇌나 생태계같은 자연현상, 주식시장이나 세계경제 같은 사회현상은
모두 복잡계로 간주된다.

복잡계는 수많은 단순한 요소가 복잡하게 연결돼 있지만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혼돈 대신에 질서를 형성한다.

복잡성 과학의 본거지는 벨기에의 브뤼셀과 미국의 샌타페이.

브뤼셀 학파의 터줏대감은 한국을 여러 차례 다녀간 프리고기네다.

열역학적으로 비평형 상태에 있는 계에서 질서가 갑자기 자연발생하는
현상을 연구해 1977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는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질서를 무산구조(dissipative structure)
라 명명했다.

특히 생명의 본질을 무산구조로 설명함에 따라 찬반논쟁이 일어났으며 일개
과학자가 아니라 사상가로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한편 샌타페이 연구소에서는 열역학에 한정된 프리고기네와 달리 세포분화
에서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복잡계가 질서를 창발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이론을 찾기 위해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컴퓨터과학 등 학제간 연구를 전개
하고 있다.

최근 복잡성 이론은 정보산업과 벤처 비즈니스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사업
전략과 맥이 닿아 있어 기업인 사이에서도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샌타페이 연구소의 경제학자 윌리엄 브라이언 아서는 프리고기네의 글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순익체증이론이 새로운 경제학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수익체증은 수익체감과 맞서는 개념이다.

수익체감은 두번째 과자가 첫번째만큼 맛이 없는 것처럼 작은 효과가
사라지기 쉽다는 뜻이다.

수익체감의 조절기능에 의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유지되고, 어떤 회사도
시장을 독점할 만큼 성장하지 못하며, 경제는 항상 평형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서는 경제를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수익체증의 원리가
적용되는 복잡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익체증이란 제품 기술 또는 기업이 시장에서 한번 앞서면 고착(lock-in)돼
더욱 앞서 나가게 되고 우위를 한번 빼앗기면 더욱 악화되는 경향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가장 우수하고 효율적인 기술이나 기업이 자유시장에서 반드시
성공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며 경쟁자가 시장에 고착하기 전에 약간 앞선
시장점유율을 신속히 키워 나가면 승산이 크다는 뜻이다.

아서는 수익체증 이론이 수익체감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두 현상은 병존하며 보완적이다.

수익체감은 곡물이나 중화학처럼 안정되고 변화가 느린 대량생산 세계를
지배하는 반면 수익체증은 소프트웨어 등 승자가 거의 모든 것을 거머쥐는
정보산업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서는 수익체증의 영역에서 경쟁양식이 도박 특히 카지노와 유사하다고
보고 "예술의 카지노"에 비유한다.

카지노는 포커와 달리 어느 게임을 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게임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누가 노름에 참여하고 규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도박이다.

따라서 기술이라는 카지노의 탁자에서 승리의 월계관은 다음 게임을 예견
하는 카지노 도박꾼처럼 새로운 기술이 안개 속에서 가물거릴 때 남보다
먼저 시장에 뛰어드는 용기와 결단력을 가진 사람에게 돌아간다.

이런 맥락에서 마이크로소프트가 세계 소프트웨어시장을 석권하고 일본이
첨단제품시장에서 미국을 곧잘 궁지에 몰아넣는 이유가 설명된다.

지식기반 경제의 주춧돌로 벤처 비즈니스의 육성이 국가적 화두가 되고
있는 작금의 우리네 실정에서 음미해볼 만한 이론이 아닌가 싶다.

국내의 복잡성 과학 연구는 초창기로 불모지 상태지만 몇몇 소중한 결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97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소장학자들의 글을 모은 "복잡성 과학의 이해와
적용"이라는 책자를 발간했으며 지난달 수학자인 김용운 박사가 "카오스의
날갯짓"을 펴냈다.

김 박사는 아서의 고착이론과 자신의 문화이론을 접목시켜 한국사회의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경제이론과 문화이론 사이에 유사점을 발견한 것은 김 박사 개인의 행운일지
모르지만 복잡성 이론을 문화 해석에 적용한 것은 복잡성 과학의 울타리를
확장시킨 업적으로 평가돼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경제의 여러 현상을 복잡성 과학으로 해부한 이론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