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질투를 낳고 정념은 죄를 낳는다고 했던가?

남녀간의 사랑엔 정념이 따르게 마련이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질투가 잘못
번지면 죄악에 이른다는 애정공식은 동서와 고금이 다르지 않다.

궁중비사에 나오는 왕과 왕후가 그랬고 언론에 보도되는 치정극의 남과 여가
그랬다.

남녀간의 그런 애증을 매우 농염하게 그린 영화가 "라이브 플래쉬"다.

무대는 마드리드.

초장부터 스페인 정취가 물씬하다.

스페니시의 억양이 귀가 따갑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탓이리라.

두 경관이 한조가 돼 이끌어 가는 초반은 영락없는 "투 캅스"형국이다.

순찰차안에서 연신 독한 술을 마셔대는 껄렁한 경찰이 후배와 함께 한바탕
범죄 소탕전을 벌이나 싶었으나 그게 아니다.

제3의 사나이(청년)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치정극으로 발전한다.

선배 캅의 아내는 후배 캅과 간통하고, 후배 캅의 아내는 청년과 사통하고,
청년은 선배 캅의 아내와도 통정하고...

이들간에 질투와 분노가 폭발하면서 5인의 사랑싸움은 2명 사망, 1명 중상
으로 끝난다.

굳이 삼강오륜을 들먹이는 시대착오를 범하지 않더라도 이들은 남의 가정을
파탄시킨 중죄인에 해당된다.

그러나 명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만은 5인 모두를 아름다운 "사랑의 전사"로
그려 놓았다.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본능에 충실했던 주인공들이 얼마나 인간적이냐는
식이다.

이런 치정극은 대개 비극으로 끝나게 마련이건만 결말은 해피 엔딩이다.

사랑싸움에서 살아남은 3명중 총상을 입은 남자는 홀아비로 만들어 놓고
무사한 남녀만 골라 결합시키는 마무리는 좀 짓궂어 보인다.

사랑싸움의 패배자는 아내마저 내놔야 한다는 비정의 애정법칙을 보는 듯
하다.

이 영화는 타이틀(Live Flesh)이 말해 주듯 살아있는 육신이 꿈틀이는
농염한 스크린을 자랑한다.

원색적인 정사 장면이 여러차례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혼외정사의 현장
묘사는 일품(?)이다.

두 알몸의 곡선미 부위가 연출하는 율동미는 가히 환상적이다.

이 정도면 베드신도 예술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장면에선 신체노출이 지나쳐 모처럼 보인 신비한 영상미의
감흥을 떨어뜨린다.

감독의 애정지상주의 때문에 사랑무대에서 가차없이 퇴출당하는 무력한
"남성"이 측은하기만 하다.

원초적 애욕은 감성적 동정을 초월한다는 메시지가 그런대로 설득력을
보이지만...

사족-.

원제(Carne Tremula)를 번역한 영어를 그대로 제명에 도입한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영화가 개봉된 날이 공교롭게도 한글날인 데다가 "Fresh"를 "플레시"가
아닌 "플래쉬"로 잘못 표기하여 타이틀을 붙인 사람은 세종대왕께 이중으로
죄를 지게 됐다.

흥행을 위해서 스페인어를 그대로 쓰기 어려웠다면 영어표기라도 제대로
했어야 했다.

영화가 대중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작명을 엄격히
따지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 편집위원 jsri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