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 전 건설부차관 >

텔레비전을 통해서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대화가 있었다.

거의 모든 텔레비전 채널이 동원되었다.

멀기만 하던 대통령과 국민간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진 것 같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대통령의 진솔한 이야기에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미국의 루즈벨트대통령도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노변정담을 통해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곤 했었다.

이번 대화의 성과는 무엇보다 그동안 난마와 같이 얽혀있던 여러 정책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방향을 제시해 주고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면서 아직도
남은 먼 길의 고통분담을 설득하였다는데 있다 하겠다.

경제현안에 대해 대통령은 나름대로 철학이 있고 확신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기회에 몇가지 첨언을 하고 싶다.

첫째, 대통령은 경제에 대한 자신감으로 지나치게 경제를 낙관하고 있는
것 같다.

금년 2%의 성장,내년에는 5%의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동안 여러
연구기관에서 내놓은 전망치와 비슷하다.

지난 1년간 우리는 많이 방황하였다.

그동안 수렁으로 빠져들던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다는 여러 징후가 있지만,
그래도 계속 실업은 늘고, 엔화, 위안화의 수준은 불안하고, 세계경제사정도
불확실하다.

그런데 갑자기 금년초부터 우리나라에는 다시 삼페인을 터트리는 풍조가
퍼지고 있다.

소비가 늘어 과소비 기미마저 보이고, 부동산이 들썩이고, 증권시장으로
투기자금이 몰려들었다.

경제에 대한 낙관은 다분히 희망적인 예측이 깔려 있는 것이다.

아직 축배를 들 때는 아니다.

정부는 보다 정확한 진단을 바탕으로 개혁과 구조조정과 경기부양의 방향을
옳게 설정해야 할 것이다.

둘째, 대통령은 재벌개혁에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기회있을 때마다 자율경제를 외치면서 타율적 빅딜에 매달려 왔다.

이번에 빅딜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도 확인되었다.

30대 재벌중 중위권의 그룹들은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비해 5대 재벌의 구조조정에는 가시적 성과가 별로 없다.

이것은 5대 재벌이 빅딜이라는 정치권의 요구에 시달리느라 자체적 구조조정
의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 노사문제와 지역감정이 얽혀서 더욱 풀기 힘든 과제가 되었다.

지금은 재벌개혁의 주체와 목표,즉 누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호하여 졌다.

재벌개혁에 대해 정부에서 할 일이라곤 없다.

지금이라도 재벌개혁에 대한 금기를 풀고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

셋째, 정부는 매서운 칼날을 금융기관이나 재벌에 휘두르면서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에는 등한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통령은 나름대로 공공부문의 개혁에도 성과가 있었다고 하나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이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이 과연 국립 이어야 하는지, 거의 모든 방송매체가
공영이어야 하는지, 철도가 계속 국영으로 남아 국민의 세금을 까먹고 있어야
하는지, 포철의 문어발은 자를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 검토된 바도 없다.

인공위성으로 떠돌던 공무원 몇자리가 없어지고,출연기관이나 정부투자기관
의 정원이 조금 손질되었을 뿐이다.

그나마 공직자들의 낙하산인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정부의 조직개편이 연구중이고, 공기업의 민영화 대책도 연구중
이라고 한다.

왜 이리 시간만 보내고 있는가.

전 세계에 조직망을 갖고 있는 대기업은 몇 주내에 교환하라고 하면서
조그만 공기업 하나 민영화하는 일에 연구만 거듭하고 있는가.

국민들은 정부부문의 구조조정을 주시하고 있다.

지난 1년동안 많은 경제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방황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국민연금파동이나 경제청문화를 보자.

지금 이 판에 우리가 국민연금으로 떠들고 청문회를 열어 과거를 파헤치는데
열중해야 하겠는가.

아직도 거리에는 실업자가 늘고 있다.

노사관계도 불안하다.

벤처기업이나 공공사업을 통한 실업해소의 노력도 여의치 못하다.

아직 우리는 어두운 터널의 한 복판에 있다.

대통령이 지적한 것처럼 고통스럽지만 개혁도 계속되어야 한다.

과거 우리 경제는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였다.

고속성장의 엔진이었던 경제개발계획 같은 구호성 계획은 오늘날에는
적합치 않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난국이야말로 정부의 역할과 리더십이 강조되는 때이다.

대통령 혼자 뛰는 정부는 곤난하다.

대통령이 방향을 보여주었으면 이제 정부가 나서서 국민적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보여주어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