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도성장은 이제 흘러간 유행가 ]]

국제통화기금(IMF)에 달려가기 꼭 1년전인 96년 12월12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이 됐다.

너무 빠르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간의 성적표가 시기상조론을 잠재웠다.

그도 그럴것이 한국은 정말 빨리 달려왔다.

30여년간 연평균 8.6%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경제규모나 교역량에서 모두 세계11위에 올랐다.

떵떵 거릴만 했다.

한국 관광객은 세계 어디서나 최고의 고객이었다.

그러나 그럴듯 하던 이 성이 "모래성"이었음을 아는데는 1년이 채 안걸렸다.

무너진 고도성장의 신화-.

건국 반세기를 접는 한국의 현주소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은행에 경영권 포기각서를 내는 총수는 억울해서 눈물을 흘린다.

퇴출은행의 여행원,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근론자들의 심정도 매
한가지이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길래..."

그러나 원인을 분석해보면 억울해 할 이유도 없다.

프랑스 크레디요네 은행의 베르나르 자규에 수석부행장은 "한국은 단기간내
너무 급성장했으며 그 성장의 상당부분이 대외채무에 의존했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좀더 신랄한 비판도 있다.

미 얼라이언스 캐피털의 데이브 윌리엄 회장은 "처음에는 단순한 외환위기
정도 인줄 알았는데 내용을 파악해보니 총체적인 경제구조의 문제였다"고
꼬집었다.

이들의 지적이 아니라더라도 "한국경제호"에는 구멍이 많았다.

엔진이라 할 수 있는 경제모델부터 시원찮았다.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데는 충분했을런지 몰라도 망망대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시아경제연구소의 하나부사 부장 등 일본내 한국경제 전문가들은 "정부가
특정기업을 집중 육성하는 정부주도의 일본식 경제모델에다 산업구조도
일본과 흡사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일본 이토추상사의 채정우 회장은 "한국의 경제모델은 일본의 나쁜 점을
너무 많이 닮았다"고 비판했다.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은 마치 올림픽에 파견하는 국가대표
선수를 키우듯 재벌을 육성해왔다"며 "그러다 보니 소수 대기업을 제외하곤
대부분 구멍가게 수준을 면치 못했다"고 지적했다.

서비스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체매출에서 물류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8.8%나 된다.

미국(6.4%)은 물론 중국(4.7%) 동남아(3.3%)보다도 처진다.

우리식 경제모델의 또하나 맹점은 국내산업에 대한 지나친 보호였다.

외국인들에겐 "팔기만 하고 사지 않으려는" 한국인들로 비쳤다.

외국자본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도 강했다.

지난 86~96년사이 한국이 유치한 외자는 88억달러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중국은 1천3백억달러의 외자를 불러들였다.

벽을 쌓아놓으니 외자가 옆집으로 간 꼴이다.

그렇다고 세계를 주무르는 산업도 없다.

덩치는 크다.

자동차를 보자.

연간 생산능력이 4백20만대로 세계 5위수준이다.

반도체는 64메가D램의 경우 세계시장의 40%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실속은 없다.

세계적인 컨설팅업체인 맥킨지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 자동차산업의
노동생산성은 미국을 1백(95년기준)으로 했을때 48에 불과하다.

반도체산업도 50을 겨우 넘었다.

기계설비 등 자본투입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자본생산성도 미국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자동차 48, 반도체 54, 정보통신 58 수준이다.

정부가 주도하면서 망친건 또 있다.

관치금융이 바로 그것이다.

정치권과 관리들의 지시를 받아온 금융기관들으 경쟁력을 갖출 틈이 없었다.

폴 새뮤얼슨 미 MIT대 교수는 "관료주의, 정치부패, 재벌의 과도한
사업확장때문에 금융기관들의 부실대출이 크게 늘어난 것이 문제였다"고
진단했다.

엔진뿐만 아니다.

갑판 등에도 구멍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노사관계다.

80년대 이후 고임금, 강성노조, 노동시장의 경직성 등이 국내기업을 해외로
내몬 동시에 외국기업의 진입을 가로 막았다.

국민성은 어떤가.

건전한 소비를 찾기 어렵다.

"싹쓸이 보신관광"과 "어글리(ugly)코리언"은 한국인 관광객들의
전유물이었다.

일본 국제문제연구소 쿠라다 박사가 IMF이후에도 과소비풍조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전에는 오죽했겠는가.

이쯤되면 한국호의 난파는 예정된 불행이었다.

물론 한국경제호의 앞날을 밝게 보는 시각도 있다.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의 돈술 교수는 "현재 한국경제의 문제는 일시적인
금융문제이지 펀더멘털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아시아위기를 "날벼락"으로 진단한 하버드대 제프리 삭스교수도 낙관론을
펴고 있다.

김우중 전경련회장대행(대우회장)도 "1조달러어치의 설비를 제대로 돌리고
2년간 수출만 잘되면 위기에서 금방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받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구조적인 문제가 없다고,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대신 30여년간의 고도성장을 지지해온 버팀목을 바꾸는게 현명하다.

발전패턴의 전환기에 와있다는 얘기다.

흘러간 유행가는 더 이상 부를 필요가 없다.

위기의 원인을 제대로 찾아내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

"제2의 건국"은 뼈아픈 반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