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그룹 총수가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마음 먹고 재단설립을
추진했다.

그는 혼탁한 자본도 물처럼 자정작용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더러운 물이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동안 나무뿌리나 바위에 부딪혀
맑아진다는 것이다.

계열사도 주력기업 몇 개만 남겨 상호보증 없이 탄탄하게 굴러갈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뜻하지 않은 암초에 부딪히고 만다.

아들 삼형제가 아버지의 "꿈"에 반기를 들고 온갖 수단으로 재단설립을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로 작가 김준성(78)씨의 소설집 "욕망의 방"(문이당)에 나오는 중편
"흐르는 돈"의 일부다.

부총리까지 지낸 그가 팔순을 앞두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돈과 인간의
관계를 소설로 엮었다.

중.단편 6편을 모은 이번 창작집에는 표제작을 비롯 "돈 그리기" "흐르는
돈" "증언" 등 돈시리즈가 4편이나 들어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수 있는 돈은 삶의 희비를 가르는
칼날이자 탐욕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분화구다.

이런 돈의 속성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은 드물다.

돈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한 고려말 임춘의 "공방전"이나 조선후기 박지원의
"허생전" "양반전" 등이 있지만 돈 자체를 중심테마로 삼은 작품은 흔치
않다.

실물경제 현상과 문학적 사유의 끈을 깊이있게 연결할 수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김씨는 "행복한 작가"다.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대구은행장 제일은행장 외환은행장 산업은행총재
한국은행총재 등을 역임한 그는 화려한 금융경력을 바탕으로 돈의 본질과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스스로도 "83년 공직을 떠난 이후 돈에 대한 주제에 집착하게 된 건 평생
돈과 연관되는 직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표제작 "욕망의 방"에서 손상된 지폐를 분쇄처리하는 화폐 정사실
기술자를 내세워 현대인의 비뚤어진 욕망과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한다.

"돈 그리기"에서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화가를 통해 위조지폐처럼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허상을 해부한다.

"증언"에서는 대학 수석입학생이 가난때문에 좌절, 한 호텔에서 거리에 돈을
뿌리는 얘기를 그린다.

외과의사겸 화가가 생명의 순수함을 되찾으려 애쓰는 모습의 "바다에서",
소외노인을 통해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을 그린 "사랑"도 녹록지 않은
작품이다.

김씨는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58년 "현대문학"에 단편 "인간상실"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동안 작품집 "들리는 빛" "양반의 상투"와 장편소설 "먼 시간 속의 실종"
"사랑을 앞서가는 시간"을 냈으며 지난해부터 문예지 "21세기문학"을
발간하고 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