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도 경제학자가 될 수 있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말만 되풀이해도 웬만한 경제학 강의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이론경제에 있어서 수요 공급이 중요함을 강조한
말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현실을 무시하고 틀에 박힌 원론만을
곧잘하는 경제학자들을 빗댄 말이라 생각된다.

요즈음 정부가 갖고 있는 우리경제에 대한 인식이나 처방이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대기업부도파문이나 금융불안상황을 두고 정부가
개입하기 보다 시장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느긋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나,
국내 경제기반은 여전히 건실하다는 낙관론으로 일관하는 것 등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지난 25일 발표한 "금융시장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대책"만 해도 그렇다.

이번 대책은 자금사정이 어려운 은행에 대해 한국은행의 특별융자를
실시하고 종금사에 대한 자금지원, 금융기관 대외채무의 정부 지급보증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비상조치적인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고 실효성에 대해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같다.

대책마련의 실기가 그 첫째 요인이고, 그 다음은 내용이 백화점식으로
나열은 됐지만 갖가지 전제들을 달아 과연 실행의지가 확고한지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때문이다.

경제정책의 시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시기를 놓치면 효과는 반감되게 마련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한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번 대책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한은특융 실시여부였다.

논란끝에 지원해 주기로 했으나 금융기관의 자구노력을 포함하는 경영
정상화계획을 제출토록해 이를 검토한뒤 요건이 충족되면 지원해주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규모나 지원조건 등도 딱부러지게 결정된게 없다.

강경식 부총리는 한은특융을 지원하려면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금리보다 월등히 싼 금리로 지원하는 특혜인데다 통화증발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국민의 부담을 수반하는 조치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책임회피로 비쳐지고 있다.

기아문제의 처리에 있어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WTO(세계무역기구)체제하에서 개별기업에 대한 지원은 통상마찰의 소지가
크기 때문에 신중해야 된다는 논리를 폈다.

이것 역시 긴박한 위기상황에서는 핑계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요즈음 시중에서는 남북한이 다같이 "기아"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북한은 기아, 우리는 기아문제라는 농담들을 주고 받는다.

금융불안의 해소도 따지고 보면 기아해법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것 역시
난해하기만 하다.

채권금융단과 한 편을 이루는 정부와 기아그룹 종사자들간의 힘겨루기
양상이 지속되고 있다.

김선홍 회장 등 기아경영진의 사표제출을 요구하는 정부측과 못하겠다는
회사측의 속셈이 무엇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유야 어떻든 기업을 부실화시킨 최고경영자는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다.

그렇다고 채권금융단에 사표를 내지 않으면 지원할 수 없다는 정부의
논리도 이해가 안된다.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경제회생을 위해서는 보다 과감한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시장기능에 의해 치유되도록 하겠다면 부도유예
협약도 폐지하고 모든 일을 은행과 기업 등 당사자들에게 완전히 맡겨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내심으로 바라는 금융기관 통폐합 등 구조조정도 쉽게
이뤄질 수 있다.

반대로 그럴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발벗고 나서야 된다.

국민경제 전체의 위기로 발전된 지금의 상황에서 원론적 처방을 강조하는
것은 특혜시비가 두렵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지기 싫다는 방관에 불과하다.

20세기초 미국의 대표적 신고전파 경제학자이자 화폐수량설로 유명한
어빙 피셔(Irving Fisher, 1867~1947)는 대공황의 시작인 1929년의 주가
대폭락이 일어나기 2주전인 10월15일 주식투자자들에게 "주식가격은 영구적
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는 낙관론을 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예일 대학의 저명한 경제학교수로서 재정금융문제 전문가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거금의 주식투자를 하고 있었고 기업활동의 자문은 물론
경제예측가로서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그의 말에 회의를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이 20세기 최악의 예측으로 기록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당시의 주가폭락으로 자신도 1천만달러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의 명성이 곤두박질치고 몸담고 있던 예일대학에서
조차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그런 실수가 있었을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무지였다고는 볼 수 없다.

아마도 현실경제의 변화를 세밀히 관찰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대한
믿음이 지나쳤던 것이라고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

고집스런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정책당국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
중의 하나다.

원론만을 되풀이하는 앵무새강의도 득될게 하나도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