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커다란 산이 하나 있었다.

그 마을에서는 매일 물을 길러 멀리 떨어진 산 꼭대기에 힘들게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마을의 최고어른인 할아버지는 어느날 산을 움직여서 옮겨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는날 지나는 행인이 하도 궁금하여 그 산을 정말 움직일 수
있으리라 믿느냐고 할아버지께 물었다.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를 나는 물론 산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매일 하나씩 돌을 옮겨 놓는다면 언젠가 나의 손주 세대들은
산을 움직일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전해내려오는 말이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하는 일이란 바로 산을 움직이기 위해 돌
하나를 옮겨놓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사람들은 늘 산을 움직이려고 한다.

몇대 혹은 수십대에 걸쳐 옮겨진 산은 그 때가 되면 왠지 자리가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른 자리로 또 산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시지프스의 신화나 중국의 산움직이기 격언이나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양쪽 다 비극적인 배경을 깔고 있다.

희망뒤에 숨은 깜깜한 절망, 있음 뒤에 숨은 전혀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대함은 그 산을 움직이려는 끊임없는 의지에
있다.

어쩌면 한 개인의 삶도, 하나의 문명의 역사를 쌓아올리는 일도,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그 희망찬 꿈을 실현하는 일도 다 이와 같을지 모른다.

우리 경제를 빛나게 하고 후세에 남겨줄 아름다운 문명을 건설하는 일도,
어느날엔가 이루어질 통일을 위한 남한의 북한에 대한 말걸기도, 열네살
소녀에게 윤락행위를 시키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뒷골목 역사를 근절시키는
일도,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한 뿌리를 지닌 집들의 도시로 만드는 일도,
라면도 콩나물도 두부도 마음놓고 사먹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만드는 일도
모두 산을 움직이는 일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돌하나를 조심스레 들어 옮겨놓는 중요한 일꾼들인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