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가란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므로 사회적인
존경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자선가라고 반드시 부자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자선이란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울어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가에 가치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캘커타에서 일생을 빈민구재에 바친 테레사수녀는 가난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녀는 청빈을 서약했기 때문에 무엇이나 자기 소유물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만큼 희생적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봉사했다.

그녀가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라 다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을 뿐"이라고 말 한것은 그녀가 무엇때문에 가난한 이웃에게
봉사했는가를 알게한다.

러시아 작가 레온 돌스토이는 "독서의 수레바퀴"에서 "자선은 그것이
희생일 경우에만 자선"이라고 말했다.

또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한 걸음 더 나가 "나는 자선하는 부자를
미워한다"고 극언마저 서슴치 않았다.

부자가 자선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부자의 자선엔 희생이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신약성서 마르코복음 12장 41절에서 44절에 "과부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과부 한 사람이 겨우 동전한닢을 헌금궤에 넣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는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은 다 넉넉한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라고 칭찬했다.

불경에 나오는 "빈자의 일등"과 같은 맥락의 교훈이다.

물론 부자가 자선사업을 크게 하는 것도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70년대 할머니가 전국을 돌면서 행상을 해 피눈물 나게 모은
전재산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층더 감동을 느끼게
된다.

전재산이 얼마이던 간에 그 할머니의 행동은 무상의 행위이고 또
그 재산이 정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뽀빠이" 이상용씨가 "심장병 어린이 수술비 모금"이란 명목으로
책과 연하장을 판매한 대금중 많은 부분을 빼돌렸다고 해서 말썽이
되고 있다.

진실은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자선이란 금액의 다과나 사회적인 인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외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오 6장3절)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