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사막, 대상의 행렬이 연상되는 "실크로드".

그러나 이길은 중세이후에 해운 등 새로운 교통수단의 발달 등 오랫동안
잊혀진 길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실크로드"는 모든 사람의 뇌리속에 신비에 싸인 비밀스럽고
매혹적인 대상으로 남아있다.

한평생 수송외길을 걸어온 한진그룹 조중훈회장이 지난 8월 실크로드의
꽃인 돈황을 다녀왔다.

<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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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통털어 유라시아 대륙이라고 말할때 그 대동맥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실크 로드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동서 문화교류의 루트였던 것이다.

이 루트는 오늘날에 서안으로 불리는 옛날의 장안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난주 주천 안서 돈황을 거쳐 천산산맥 줄기의 위아래로 나뉘어져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로 발전했다.

이 길 위로 2,000여년전부터 동서 물자 교역을 하는 캐런밴들이 낙타를
타고 오갔다.

문화와 예술, 종교와 철학이 함께 교통하였음도 물론이다.

나는 바로 이 험한 길들을 지프차로 달려보고 싶었다.

그러나 점점 체력에 한계도 느끼게 되고 주변의 만류도 심해 차일 피일
미루다가 하나의 타협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흔히 실크로드의 꽃이자
교차로라 일컬어지는 돈황 답사였다.

돈황.

사람들은 오늘날 이 조그만 고도를 "사막 위에 세워진 김자탑"이라고
부른다.

인구 15만명 남짓되는 이곳 지명을 딴 "돈황"이라는 이름의 담배까지
중국에 있다는 사실은 중국사람들이 이 도시에 대해 갖는 자부심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수 있게 해준다.

하얀 색깔의 이 담뱃갑에는 "돈황 석굴은 서기 386년부터 1367년 사이에
세워졌는데, 세계 최대의 불교 예술의 보고"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막고굴로 대표되는 돈황석굴은 남북조 시대에 시작되어
원나라 말기까지 1,000년 이상이나 긴 세월 동안 내려오며 동서의 문화와
한 시대의 생활양식등이 기록된 보물창고인 셈이다.

<>.돈황시의 동남쪽에 있는 막고굴까지는 자동차로 20분쯤 소요되는데,
사막의 모래가 쌓여 산을 이룬 명사산의 동쪽 절벽에 펼쳐져 있다.

높이 약 30m, 남북으로 펼쳐진 폭 1,600m쯤되는 절벽에 크고 작은 굴들이
자그마치 1,000여개나 뚫려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서기 366년에 낙 이라는 스님이 이 부근을
지나다가 불가사의한 빛이 비쳐 명사산 절벽에다 굴을 뚫고 수행을 시작
했으며, 그 뒤를 이어 다른 스님도 동굴을 팠다는 것이다.

그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1,000여년에 걸쳐 여기에 굴을 뚫고 법당이나
승방을 만들어 예배와 수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불상을 만들어 놓아
이 거대한 자연 미술관을 이룬 것이다.

이 굴들은 모래와 진흙이 섞여서 이루어진 퇴적암이어서 불상을 조각하거나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벽면에 흙을 발라 그림을 그리고 나무골재나 풀새끼를 묶고 흙을
이겨 상을 만들고 백토로 마감하여 색채나 금박을 입히는 등의 여러가지
기법을 활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굴들을 오늘날 "막고굴"이라 부르는데 사막 높은 곳에 있는 굴이란
뜻이었다는 풀이다.

특히 내가 둘러보았던 굴 중에는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은 것도 더러 있어
한두번 다녀온 분들께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중의 하나가 지금부터 1,400여년전인 북위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되는 막고굴 초기의 254번 굴이다.

이곳은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아 국내에도 별로 소개된 적이 없는데, 벽의
그을음 자국등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120년전쯤 러시아 내전 당시 백러시아 소속 군인들이 여기서 생활하며 밥을
짓던 자국이라고 한다.

이 굴의 벽화에는 불교의 설화를 하나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낸 것도
있는데, 독수리를 피해온 비둘기를 위해 왕이 자신의 살점을 독수리에게
내주어 하늘이 감동하였다는 내용이 장면 하나마다 정교한 그림으로 사실적
으로 묘사되어 1,400여년전 당시의 불교사상에 대한 깊이를 엿볼수 있게
해준다.

막고굴에서 명문으로 확인할수 있는 가장 오래된 굴이 285번 굴이다.

이 굴은 연대 확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지만 내부의 화려한
벽화등 내용에서도 45번 굴 및 427번 굴과 함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굴의 천장에는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번개신 바람신과 같은 신선세계가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수나라때 만들어진 427번 굴은 정면에 부조된 3개의 불상과 함께 벽면에
빼곡하게 그려진 천불로 유명하다.

중국 속담에 "눈을 떠서 불상이 많이 보이면 공덕을 많이 쌓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참 대단한 인내심으로 그린 것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96번 굴은 1,300여년 전인 당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흔히 북대불전으로 불리워지는 이 굴에서는 누구나 대불을 가랑이 밑에서
올려다 봐야 할만큼 거대한 미륵대불을 만나게 된다.

높이가 33m나 되는데, 밖이 아니라 굴 속에 있어 더 웅장하고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거대한 불상이 또 하나 있는데, 남대불전이라고 불리는 26m 높이로 130번
굴에서 불상의 얼굴을 볼수 있다.

이 두개의 대불이 입상이라면, 158번 굴에는 누워 있는 와불이 있다.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인 당나라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부처님이 열반할
때 모습을 흙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길이가 약16m이다.

막고굴의 대표적 걸작중 하나로 45번 굴을 빼놓을수 없다.

이 굴도 성당시대에 만들어진 굴로 알려져 있다.

정면 중앙의 부처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3개씩의 제자와 관세음보살상
등이 있다.

불교미술가들의 평에 의하면 이 45번 굴의 관세음보살상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모양은 여자임에도 수염을 그려 놓은 특색을 갖고 있다.

굴의 크기도 작고 보잘것 없으나,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17번굴이다.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많은 고문서들과 서화들이 5만점이나
바로 이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막고굴중에서 비교적 큰 굴에 속하는 16번굴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데 일종의 승방이었다고 한다.

원래는 장경동이라 하여, 송나라 시대에 귀중한 문헌들을 보관해 놓았으나
전란중에 봉쇄된 채 잊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이 20세기 초에 한 도사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소문이 나자, 1907년
영국의 지리학자인 스타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일부를 헐값에 사들였고
그 이듬해에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다시 찾아와 나머지 가운데에서
진귀한 문헌들을 5,000여점이나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현재 17번 굴에는 그러한 문헌 한점 없이 텅 비어있고 이 승방을 처음만든
것으로 알려지는 홍변스님의 승상만이 벽에 그려져 있는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덩그렇게 안치돼 있다.

이렇듯 돈황의 막고굴은 역사의 신비와 불교 미술이 어우러진 최대의
미술관이며, 사막에 솟아 있는 김자탑이기도 한 것이다.

현재까지 492개의 굴이 발굴.복원돼 있는데, 각 굴에 있는 불상을 모두
합하면 그 수가 3,000개에 이르고 벽화를 떼어 내어 2m 높이로 펼쳐 놓으면
60여km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돈황의 석굴이 사람이 만든 예술 창고라고 한다면, 이 굴을 품고 있는
명사산은 사막의 모래바람이 만든 자연의 걸작품이다.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서 쌓이기 시작하여 황금빛 모래산을 이룬
것인데, 남북으로 20km, 동서로 40km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절경은 따로 있는 법.시내에서 남쪽으로 5km쯤 떨어진 곳에 관광객
을 위한 최고의 경치가 펼쳐져 있다.

"명사산 월아천"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문으로 들어서면, 마치 택시 정류장
처럼 늘어선 낙타가 준비되어 있다.

여기의 낙타도 몽골의 것처럼 등이 쌍봉인데, 그 위에 올라 앉아 흔들
흔들 모래산 위를 올라 보는 것이다.

특히 일몰 시간이 제격이다.

명사산 등성이와 능선에 석양의 햇살이 비치고 그 굴곡에 따라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된 광경은 저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대단하다.

칼날처럼 가파르게 하늘과 경계한 산등성이, 그 위로 반짝이는 햇살을
받으며 능선을 타는 낙타의 무리를 보면, 그야말로 하늘로 오르는 길이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 같다.

이 절경에 더하여 산밑에 마치 상아나 하현달 같은 곡선을 이룬 길이
200m의 오아시스 월아천이 있다.

햇빛에 따라 명사산의 색감이 변하듯 월아천도 아침 햇살에는 붉게 물들고
점점 파란색을 띠다가 저녁이 되면 모래빛으로 바뀌는 것이다.

돈황 관광의 핵심은 이렇게 막고굴과 월아천을 포함한 명사산 두군데라고
할수 있는데, 시내에 있는 박물관과 해질녘부터 열리는 야시장도 이곳의
숨결을 느껴보기 위해서 빼놓을수 없는 볼거리이다.

모래산의 한끝에 굴을 파고 불상을 빚은 사람들, 벽화를 그린 사람들,
거기에 경배를 하는 사람들과 1,000여년이 지나 여기를 찾는 사람들.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공간을 뛰어넘기 위해서 그 옛날에도 국제무역을
하는 상인이 있었고 사람들은 길을 만들었고 또 교통을 발달시켰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미래로 이어질
우리들의 좌표는 어떠할까 하는 감상에 젖어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