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당의 박찬종 대표와 서훈 의원(무소속)은 24일 낙동강 오염지역을 특
별대책지역으로 지정하고 추경예산안을 편성, 응급대책을 수립하라고 촉구
했다.
박,서의원은 이날 오전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죽은 물 낙
동강 오염개선 대책안>을 발표, "낙동강은 죽은 물로 음용수의 사용한계를
넘어 낙동강유역 주민의 건강을 심각히 위협하고 있어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해야 할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그린라운드에 대비,국책사업 우선순위 사업으로 맑은 물 살리
기에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말하고 "낙동강오염지역에 대해 수질보전 특
별대책지역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경영수업을 받은곳은 유수한 일류대학의 비즈니스
스쿨이 아니라 뉴욕 애머티에 있는 한 종교집단. 그곳은 20세기초
동유럽종교계에서 신세기생철학(New Age Life Philosophy)과 고된
육체노동을 신조로 활동했던 러시아의 신비주의자 게오르그 구르지예프의
후계자인 윌리엄 닐랜드가 세운 공동체집단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몸소
노동을 실천,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오셔는 자기비판과 육체노동을 통한 정신적 성장을 강조했던
구르지예프의 철학에 끌려 71년 보스턴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뒤
곧바로 애머티로 향했다. 애머티에서 그는 힘든 노동은 물론 일을
하지않을 때에도 헛간과 같은 초라한 가옥에서 장시간의 집회와 의식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결코 유쾌한 생활은 아니었죠. 거기서는
모든것을 포기해야만 했어요" 오셔와 함께 애머티생활을 했던 동료
로날드 챔벌린의 회상이다.

오셔는 그곳에서 목재가공이나 배수관공사등 실용적인 생활기술을
익히면서 "실사구시"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애머티에서의
생활이"사물을 다루는법을 알지 못한채 자랐던 나에게는 값진
경험이었다"며 비즈니스스쿨에서는 얻을수 없는 소중한 삶의 체험을
가졌다고 말한다.

75년 신시내티로 돌아온 오셔는 독자적인 신기술을 이용, 온수기나
샤워시설에 쓰이는 절전단열피복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친구들로
부터 5만달러의 창업자금을 지원받아 "컨서브"라는 소규모 벤처회사를
세웠다.
후에 그는 아동용가구까지 만들어 냈으며 매출액도 6년만에 30배가
늘어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사업을 구상, 마침내
유년기의 꿈이었던 완구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오셔는 87년
자기회사지분의 40%를 나눠주는 조건으로 친구들로부터 30만달러의
자금을 조달받았다. 창업자금중 1백만달러는 벤처캐피털회사들이
제공해 주었다.
그의 첫번째 제품인 "블루밍돌"이라는 화분인형은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완구사업을 시작한 첫해에 그는 70만달러의 적자를 보고 말았다. 고통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 다음해엔 이혼의 쓰라림을 겪어야 했기때문
이다. 그러나 구르지예프의 후예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아이들만큼이나 변덕스러운 장난감시장에서 그는 지칠줄 모르는
집념으로 아이디어개발에 전념했다. 드디어 89년 오셔는 재기에 성공
했다. 20달러 가격의 농구놀이기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캡토이스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할수 있었고 그해에 5백만달러의 매출에
40만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
그후 연이은 신제품출시로 캡토이스의 매출액은 꾸준히 늘어 작년에만도
4천만달러에 달한것으로 알려졌다.

오셔는 현재 싯가로 1천만달러에 달하는 28%의 자사지분외에도 고액의
연봉을 받는 기업인으로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구르지예프의 가르침을 결코 잊지않고 있다.
그는 매일아침 업무에 앞서 명상시간을 갖고 사원들에게도 자기발전
계획을 세울것을 당부하는등 구도자적인 경영자의 길을 걷고있다.

<이영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