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직원 이모씨(30)는 매주 토요일 아침 구두를 닦는다. 가죽 종류와 색이 다른 다섯 켤레의 구두를 꼼꼼히 닦는 데만 꼬박 두 시간이 걸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하는 탓에 주말이 되면 녹초가 되기 일쑤지만 한 주도 빼먹지 않고 구두를 닦고 있다. 그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구두마다 구두약이 다르고 닦는 방법도 제각각인 게 재미있어요. 얼룩이 사라지고 윤이 나는 구두를 보면서 회사에서 받은 상처도 사라지는 듯한 묘한 ‘희열’을 느낍니다.”
[김과장 & 이대리] 술집·노래방 대신 미술학원에서 '명화 그리기' 몰입… 달라지는 직장인들 스트레스 해소법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와 직장 상사의 갑질, 진상 고객 등에 찌든 직장인이 넘쳐나고 있다. 직장 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술집이나 노래방을 전전하는 것도 이제 옛말이 됐다. 요즘엔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신세대 직장인이 늘고 있다. ‘분노방’ 등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이색 서비스를 찾기도 한다. 난세를 살아가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들어봤다.

회사를 잊는 ‘초집중’

직장과 관련한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는 방법 중 하나가 ‘초집중’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직장인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통한다. 제약업체 영업사원인 최모 대리는 실적 부담으로 원형 탈모까지 생기면서 병원이 아니라 미술 학원을 찾기 시작했다.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따라 그리며 스트레스를 푸는 게 그의 유일한 낙이 됐다. 최 대리는 “몇 시간 동안 무아지경에 빠져 붓질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며 “미술을 시작한 뒤 원형 탈모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증권사에서 자산운용을 담당하는 정모 과장은 퇴근하자마자 회사 근처 ‘크로스핏’ 체육관으로 향한다. 크로스핏은 다양한 근력 운동을 휴식 없이 반복하는 운동법이다. 한 시간 동안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턱걸이를 쉼 없이 반복하다 보면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린다. 동시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걱정도 사라진다는 게 정 과장의 말이다. 그는 “숨소리에만 집중하게 될 때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춤도 직장인의 대표적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리듬에 몸을 맡기고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다 보면 만사를 잊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웬만한 운동보다 칼로리 소모량이 많아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미디어 관련 회사에서 일하는 박모 대리도 이런 이유로 1주일에 두 번 퇴근길마다 서울 신촌에 있는 방송댄스 학원에 간다. 갈 때마다 ‘블랙핑크’ ‘트와이스’ ‘여자친구’ 등 걸그룹의 인기곡 안무를 배운다. “사무직이란 게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와 손만 쓰잖아요. 머리가 아니라 몸을 쓰는 활동을 좀 하고 싶었는데 춤추는 게 딱이더라고요.”

퇴근 후 사람 피하는 ‘식물족’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도 있지만 이와 정반대로 퇴근 후 사람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가만히 있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다. 이른바 ‘식물족’으로도 불린다. 중견 유통회사에 다니는 이모 주임은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본다. 그가 주로 보는 것은 ‘식물의 발아과정’ ‘아름다운 행성 모음’과 같이 자연을 담은 영상들이다. 단 한 명이라도 사람이 나오는 영상은 보지 않는다. 이 주임은 “영상을 보면서 ‘하루 종일 시달리게 한 진상고객 외에 세상엔 아름다운 게 많다’는 생각을 하고 마음을 달랜다”고 말했다.

보안소프트웨어 회사 직원인 채모 대리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슬라임’ 만지기다. 슬라임은 찐득해보이면서도 손에 달라붙지 않고,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대로 형태가 변하는 장난감이다. 촉감이 좋고 만지작거리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다. “짜증 나는 일이 있을 때 게임 같은 걸 하게 되면 승부욕으로 피로감만 커지는 것 같아요. 울고불고하는 드라마와 영화에 몰입할 힘도 없고요. 혼자 노는 게 최고죠.”

스트레스 해소 서비스 이용하기도

일부 직장인은 스트레스 해소 전문 서비스를 찾아 이용하기도 한다. 통신회사에 다니는 박모씨는 얼마 전 ‘분노방’을 찾았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에게 폭언을 들은 뒤였다. 분노방은 2만~10만원까지 금액에 따라 접시, 폐가전제품 등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던지거나 야구 배트로 부술 수 있는 곳이다. 이후 그는 아예 단골이 됐다. 박씨는 “방에 들어가 마음껏 소리 지르며 물건을 던지다 보면 꽉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며 “뭘 해도 화가 풀리지 않을 때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를 찾아가거나 병원을 방문하는 사례도 있다. 홈쇼핑업체에서 상품기획자(MD)로 일하는 김모 대리는 심리상담소에 다니고 있다. 한 번 상담받는 데 6만원이나 든다. 평소 느끼는 감정을 털어놓는 게 전부지만, 김 대리는 상담받을 만한 가치를 느낀다고 한다. 그는 “상담을 받으면 자신을 내려놓는 느낌이 들어 좋다”고 말했다.

주택마케팅 업체에 근무하는 심모 과장은 석 달 전부터 약을 챙겨 먹고 있다. 목과 어깨가 아플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면서다. 의사가 추천해준 약을 꾸준히 복용하자 차츰 증상이 완화됐다고 한다. “뭘 해도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도 있어요. 그럴 땐 주저하지 말고 의사를 찾아야 합니다.” 심 과장의 말이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