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이 우보농장 대표가 각종 토종 벼의 이름을 새겨 넣은 팻말 앞에서 최근 수확한 ‘졸장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가 각종 토종 벼의 이름을 새겨 넣은 팻말 앞에서 최근 수확한 ‘졸장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지난 7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기념 국빈 만찬. 네 가지 코스 요리 중 주요리로 360년 씨간장으로 양념한 한우 갈비구이와 우리 토종 쌀인 ‘북흑조’ ‘흑갱’ ‘자광도’ ‘충북흑미’ 4종으로 지은 돌솥밥이 상에 올랐다.

오래전 우리 밥상에서 자취를 감춘 토종 쌀을 되살려 이날 만찬에 제공한 이는 경기 고양에서 농사짓는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50)다.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우보농장에서 만난 그는 “우리 쌀은 ‘역사가 없다’ ‘근본이 없다’는 얘기를 듣는 게 짜증 났다”며 “토종 쌀을 되살리는 것은 우리 쌀의 근본을 찾고 맛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되찾는 일”이라고 했다.

주말농장에서 출발해 작물 공동체까지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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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자신을 ‘농사에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17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기획실장을 맡았고, 대중문화비평지 ‘리뷰’ 편집장을 지냈다. 경영 악화로 휴간에 들어간 리뷰가 2000년 라이코스코리아를 운영하는 미래산업의 투자를 받아 ‘컬티즌’이란 웹진으로 부활했을 땐 컬티즌 대표를 맡기도 했다.

시골 출신이지만 농사일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가 농사를 처음 접한 건 2000년 과천에 살 때 그의 아내가 근처 주말농장에 조그만 땅을 분양받으면서였다. “아내 따라 주말농장에 가긴 했지만 그때도 농사엔 별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몇 년 뒤 고양 일산으로 이사하고 집사람이 또 근처 주말농장을 등록해 땅을 얻었어요. 10평 정도였죠.”

기독교계 수도원인 동광원(東光園) 벽제분원에서 운영하는 주말농장이었다. 6·25전쟁 때 전쟁고아를 돌봐주던 여성 수도자들은 이제 다들 할머니가 됐지만, 아직도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동광원 할머니들이 농사짓는 것을 보고 ‘아, 이게 진짜 농사구나’ 싶었습니다. 자연의 순환을 이용한 전통 농업이었죠. 똥과 음식물 찌꺼기, 작물 잔여물로 거름을 만들고, 씨앗도 사서 쓰지 않고 수확한 작물에서 얻은 걸 다음해 다시 심어요. 어려서 농사지으며 고생한 경험이 없어서인지 마냥 재밌게만 느껴졌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 밤 새는 줄 모른다’고 한번 농사에 재미를 들이자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는 이듬해 주말농장 땅을 20평으로 늘렸고, 주말농장에서 친해진 사람들과 아예 일산에 밭 200평을 따로 마련했다. 이들 4명은 매주 토요일 아침에 만나 함께 농사짓고 수확물을 똑같이 나눠 가졌다. 그는 “농사가 잘돼 강화도에 300평, 파주에도 600평 땅을 얻어 농사를 지었다”며 “농지인데 농사를 안 지으면 각종 세금을 많이 내야 하다 보니 땅 주인들이 먼저 나서 자기네 땅에서 농사를 지어달라고 한 덕분”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이렇게 자기 소유 땅 하나 없지만 대농(大農)이 됐다. 경작하는 밭이 최대 1만5000평에 달했다. 4명이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자 ‘작물공동체’로 전환했다. 마늘, 콩, 고추 등 작물별로 매년 주말마다 같이 농사를 지을 사람을 모집한 뒤 수확하고 나면 수확물을 나눠 가진 뒤 해산하는 방식이었다.

시험삼아 재배한 토종벼에 푹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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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만 하던 그가 작물공동체를 해산하고 논농사를 짓기 시작한 건 2010년 우보농장을 세우고 이듬해인 2011년부터였다. 4500평인 우보농장 부지는 한 대안학교 이사장 소유인데, 관리가 안 돼 쓰레기가 버려지고 인근 주민이 무단으로 들어와 텃밭을 가꾸다 보니 그에게 땅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그때 이 대표에겐 토종 볍씨 30여 종이 있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얻었어요. 그때만 해도 토종 볍씨 귀한 줄 모르고 언제 한번 심어봐야겠다는 생각에 갖고 있었죠.”

볍씨라야 품종별로 10알에서 20알 정도밖에 없었다. 그걸 우보농장 한편에 고운 흙을 깔고 물을 댄 3평짜리 논에 심었다. 이듬해 벼가 익고 쌀알이 맺혔다. 3000평 논에 심을 수 있는 많은 양이었다. “그제야 급히 논을 수소문했어요. 고양시 장항동에 3700평, 구산동에 300평 논을 얻었죠. 그 뒤로 우보농장과 함께 이곳에서 토종 벼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이 대표는 작년엔 토종 쌀 64종, 올해는 103종을 심어 수확했다. 벼농사에 전념하려 프리랜서로 하던 출판 기획과 음반 제작 일도 접었다. 그는 “논농사는 물이 잘 빠지는지, 물 높이가 알맞은지 일상적인 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이틀에 한 번꼴은 논에 나가 상태를 점검해야 해 밭농사처럼 주말에만 나와 일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옛날부터 조상들이 모내기와 벼 베기만 품앗이로 서로 도와주고, 각자 논을 관리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1910년만 해도 토종 벼 1500여 종이 한반도에서 자랐다”고 했다. 일제가 쌀 수탈을 위해 다수확 품종을 강요하면서 해방될 무렵엔 토종 쌀이 450여 종으로 급감했다. 1970년대에 정부가 ‘통일벼’를 개발해 보급하면서 토종 쌀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다. 이 대표는 “통일벼가 병충해에 취약한 사실이 드러나 1980년대 들어 다품종화로 농업 정책이 다시 바뀌었지만 지금 시중에 팔리는 쌀은 대개 일본 품종을 개량한 것”이라며 “토종 벼를 키우는 농부는 전체의 0.0001%도 안 된다”고 했다.

“아직 못 키워본 토종 벼 350종 남아”

이 대표는 우보농장 한구석에 심어져 있는 북흑조를 가리켰다. 검정빛 쌀알이 아래로 늘어진 채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토종 벼를 키우면서 추수철 황금 들녘이란 표현이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북흑조를 키웠던 평안도 사람들은 추수철에 검은 들녘을 봤을 거예요. 자광도를 재배한 김포 농부들은 가을에 붉은 들녘을 봤겠죠. 1500여 종이 자랐던 옛날엔 동네마다 보이는 들녘 풍경이 달랐을 겁니다.”

그는 토종 쌀을 되살리자는 건 토종 쌀이 개량종보다 맛있거나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맛의 선호도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니 토종 쌀이 더 맛있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옛날 쌀 품종이 1500여 개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 얼마나 쌀맛의 풍요로움이 줄었는지 알 수 있죠. 작년엔 한국에서 식당을 하는 한 일본인 셰프가 ‘화도’란 토종 쌀이 일식과 잘 맞는 것 같다고 많이 재배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올해는 화도를 200㎏ 가까이 수확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맛과 색을 띤 토종 쌀 재배가 늘어난다면 한식뿐 아니라 떡과 막걸리 등 쌀을 바탕으로 한 음식 문화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약 12만 개의 주막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토종 쌀로 만든 다양한 막걸리가 있었던 거죠.”

인터뷰를 마칠 무렵 우보가 호(號)냐고 물었더니, 그는 네이버 카페를 운영하며 쓰던 별명이라고 했다. ‘어리석은 걸음’이란 뜻이란다. “어떤 거창한 사명감 때문이라기보다 제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에요. 농업유전자원센터에 토종 볍씨 450종이 보관돼 있는데, 제가 아직 못 길러본 종이 350종이나 남아 있다는 뜻이에요. 거기서 어떤 새로운 토종 벼가 자랄지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 토종 쌀, 뭐가 다르죠?
쌀알 씹을수록 단맛·감칠맛…㎏당 1만5000원 넘어


토종 벼를 키우는 농부는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를 비롯해 전국에서 30명 정도다. 이 대표는 “워낙 재배 수량이 적다 보니 ㎏당 1만5000~2만원에 판매한다”며 “이마저도 주로 시음용이나 교육용으로 소량씩 팔고 있다”고 했다. 토종 벼는 키우기도 까다롭다고 한다. 야생성이 강해 화학 비료를 주면 너무 높이 자라 쓰러지기 때문이다.

이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때 만찬에 오른 토종 쌀은 ‘북흑조’와 ‘흑갱’ ‘자광도’ ‘충북흑미’다. 북흑조는 북방 지역의 풍토를 닮아 토종 벼 가운데 키가 가장 크고 마디가 튼실하게 이어져 있다. 향이 구수하고 입안에서 씹을수록 단맛, 감칠맛, 담백한 맛이 난다. 이 대표는 “북흑조는 현미색 또는 진녹색을 띠어 백미와 같이 밥을 지으면 좋다”고 했다.

흑갱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토종 쌀이다. 까락은 검은색이지만 벗기면 흰 쌀알이 드러난다. 키가 90㎝ 내외로 작아 잘 쓰러지지 않는다. 찰기와 끈기가 강하며 흑갱 특유의 향이 난다.

자광도는 조선 인조 때 중국 지린성 남방지방에 사신으로 갔던 이가 가져와 경기 김포에서 재배하던 품종이다. 이 대표는 “안토시아닌 함량이 높아 끈기는 없지만 구수한 밥맛 덕에 궁중에 진상되던 품종”이라고 했다. 스페인 전통요리인 파에야에 어울린다는 평을 듣고 있다.

충북흑미는 벗겨낸 쌀알이 검다. 토종 벼 중에 흑미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색에서 희소성이 있다고 한다.

이 밖에 쌀알의 차진 정도가 적당해 쫀득하게 씹는 맛이 좋은 ‘자치나’, 개량종 쌀과 맛이 비슷하지만 차갑게 식어도 향과 찰기 및 윤기를 잘 유지해 먹기 좋은 ‘백경조’, 찰기가 매우 높아 떡으로 만들어 먹기 좋은 ‘강릉도’ 등이 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