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사제(근로자 이사제) 도입은 노동계의 숙원과제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도입을 약속한 데 이어 정부가 공식 추진키로 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정부는 내년 공공기관부터 시행을 목표로 구체적인 법제화 절차에 들어갔다. 근로자의 이사회 참여에 따른 ‘경영 리스크’ 확산을 우려하는 산업계의 불안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공공기관 방만경영 개선 급한데…'노동자 이사'가 개혁 찬성할까
◆노동이사제로 자율성 강화?

한국경제신문은 1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정병국 바른정당 의원이 기획재정부로부터 제출받은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방안 연구용역’ 문건을 단독 입수했다. 문건은 기재부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한 연구용역의 취지와 내용, 방법 등을 담고 있다.

기재부는 “노동이사제 도입으로 근로자 대표가 발언권·의결권을 행사하면 공공기관의 의사결정 과정이 더 민주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기관의 성과와 경영책임을 공유함으로써 노동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고도 했다.

기재부는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근로자 이사제도를 도입해 다방면의 경제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한 뒤 “한국도 공공기관의 경영 자율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근로자 이사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재부는 연구용역을 토대로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을 내년 초 개정해 내년부터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를 시행하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이를 위해 먼저 유럽 등 해외 선행사례를 검토하는 한편 올해 초부터 시범 운영에 들어간 서울시 사례도 분석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이사 후보군 선정 및 선임절차, 결격사유, 임기, 권리와 의무, 보수 등 규정을 마련하기로 했다. 노조와의 관계설정 및 의사결정 지연 등 일각에서 제기되는 문제점의 해결을 위한 보완방안도 연구과제에 포함시켰다.

◆정권 바뀌자 입장 바꾼 정부

노동계에선 수년 전부터 관련 제도를 이미 도입한 유럽의 예를 들며 근로자의 경영 참여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노동존중특별시’를 표방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근로자 이사제 도입을 추진하면서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애초 정부는 노동이사제 도입에 부정적이었다. 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해 “근로자 이사제는 국내 상황에 맞지 않고 노사관계의 근간까지 흔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정부의 태도는 성과연봉제에서와 마찬가지로 180도 달라졌다.

정부 입장이 선회하자 민간으로의 확산을 요구하는 노동계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KB금융그룹 노동조합협의회는 지난달 21일 참여연대 등 시민·노동단체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하승수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임명해달라며 KB금융지주 이사회에 주주제안서를 제출했다.

◆“공공기관 개혁과 충돌 우려”

노동이사제에 대해선 여러 측면의 비판이 제기된다. 우선 이사제도의 본질에 부합하는지 의문을 표시하는 전문가가 많다. 이사는 회사 전체의 이해 관계자를 위해 일할 의무가 있는데 근로자의 이해관계에 경도되기 쉬운 이사가 이사회에 참여할 경우 이해상충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지적이다.

이미 제도를 시행 중인 독일 등 유럽에서조차 비판 여론이 적지 않다. 독일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독일 기업인 중 53.8%가 ‘노조대표의 경영참여가 방해가 된다’고 답했다. 근로자 대표의 참여가 의사결정 과정을 더디게 한다는 응답률도 48.8%로 ‘그렇지 않다(11.3%)’의 네 배가 넘었다.

공공기관에 한정한다고 해도 당장 한국전력 등 주식시장에 상장돼 민간주주가 투자한 기관들의 지배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문제가 남는다. 정병국 의원은 “공공기관 전체 332곳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기관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고 공공기관 부채는 500조원에 달할 정도로 체질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라며 “섣부른 도입에 앞서 더 많은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