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미국’에 막대한 현금이 쌓이고 있다. 미국 기업들이 보유한 현금(단기 유가증권 등 현금성 자산 포함)은 지난해 말 기준 1조8400억달러(약 207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20일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보다 9.2% 증가한 규모다. 독일 증시에 상장된 기업 전체(1조7000억달러, 세계은행)를 사고도 남는다.
'주식회사 미국'은 현금 부자…애플 곳간엔 넷플릭스 3개 살 돈 비축
◆상위 5위까지 IT 기업이 차지

미국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기업(금융회사 제외)은 애플로 2461억달러에 달한다. 2위 마이크로소프트(MS, 1312억달러)의 두 배 규모다. CNN머니는 동영상 스트리밍업체 넷플릭스를 3개 살 수 있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애플은 무디스가 매년 시행하는 조사에서 8년 연속 ‘현금왕’에 올랐다. MS에 이어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883억달러)과 시스코(718억달러), 오라클(582억달러) 순이었다. 상위 5위를 정보기술(IT) 기업이 싹쓸이했다.

이들 5개 기업이 보유한 현금은 5940억달러로 전체의 3분의 1(32%)을 차지했다. 애플과 MS, 알파벳 등 1~3위 기업으로 범위를 좁히면 25%에 해당하는 4640억달러를 갖고 있다. 리처드 레인 무디스 수석부사장은 “IT업종만 보면 보유 현금의 약 절반인 47%를 갖고 있다”며 “바이오와 제약, 소비재, 에너지 업종이 뒤를 이었다”고 말했다.

무디스는 지난해 미국 기업의 매출과 현금 흐름이 감소하는 와중에도 보유 현금이 큰 폭으로 늘었다고 분석했다. 저성장에 빠진 글로벌 경제 환경과 에너지 분야를 비롯한 기업들의 투자 부진을 원인으로 꼽았다.

미국 기업의 지난해 매출은 10조2000억달러로 전년 대비 5.3% 감소했다. 영업활동을 통한 현금 흐름은 1조4500억달러로 5.8% 줄었다. 자본 지출(투자)은 7270억달러로 전년보다 18% 감소했다. 기업 인수액 역시 3930억달러로 2% 줄었다. 배당금 역시 3860억달러로 4.5% 감소했다.

무디스는 유가 하락으로 수익이 나빠진 에너지 기업들이 투자를 늦추고 보유 현금을 최대한 보존하려고 배당금을 35% 삭감한 게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법인세율 떨어져야 미국내 유입될 듯

월스트리트저널은 기업들의 보유 현금이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과 비교하면 2.5배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이 중 70%인 1조3000억달러가 해외에 쌓여 있다고 분석했다.

애플은 해외 비중이 94%에 달하며 알파벳과 MS, 시스코, 오라클 등도 90%에 육박한다. 해외에서 발생한 대부분 수익이 미국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쌓인 것이다.

레인 수석부사장은 “기업이 해외에 보유하고 있는 현금이 계속 증가하는 이유는 미국의 조세정책에 있다”며 “본국으로 들여올 때 적용하는 세율을 낮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외에 쌓아두면 과세대상에서 제외되지만 미국으로 반입 시 35%에 달하는 법인세율을 적용받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도 지난 1월 실적을 발표하면서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올해 정부가 세제개혁에 나설 것으로 낙관한다”며 “그것이 국가를 위해서도, 애플을 위해서도 좋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기업들이 해외 수익금을 가져올 경우 한 번에 한해 10% 세율을 적용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기업들이 해외 수익금을 국내 투자에 사용하도록 유도해 고용을 촉진하고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미 의회가 입법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올해 안에 세율 인하를 포함한 세제개편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CNN은 새로운 건강보험법안인 ‘트럼프케어’ 입법이 좌절되면서 트럼프 정부의 세제개편 추진이 어려움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세제개편이 지체될수록 애플을 비롯한 미 기업들의 해외 현금보유액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라고 전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