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이 진 벚꽃처럼…아스라이 사라진 꿈을 노래하다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사실주의 희곡이 신비로운 날개옷을 입었다. 극단 백수광부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벚꽃동산’은 꿈이라는 몽환적 개념으로 극 전체를 감쌌다. 사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가 공연 내내 무대에 감돌았다.

‘갈매기’ ‘세자매’ ‘바냐아저씨’와 함께 체호프의 4대 장막극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러시아 제정 말기인 19세기 말 한 귀족 계급의 몰락과 신흥 자본가 계급의 출현을 그린다. 현실 감각 없이 과거에 갇혀 사는 몰락 귀족 여성 라네프스카야, 농노 아들로 천하게 자랐지만 뛰어난 수완으로 자수성가한 사업가 로파힌이 두 계급을 대표한다. 몰락한 귀족이나 소시민 등 평범한 사람의 삶을 과장이나 우연 없이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체호프 특유의 사실주의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공연은 작품에 환상적 요소를 가미했다. 무대 미학을 통해서다. 무대 정면과 양쪽 측면까지 총 3개 면을 거대한 흰 캔버스처럼 활용해 크고 과감한 이미지의 영상을 투사한다. 극 초반엔 연분홍빛 벚꽃이 흩날리고, 라네프스카야가 물에 빠져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바닥에 주저앉을 땐 검푸른 강물이 넘실댄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고조된다.

몽환적 성격은 잠과 꿈이라는 개념이 극의 처음과 중간, 끝을 꿰면서 더 짙어진다. 극은 로파힌이 라네프스카야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졸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해 늙은 하인 피르스가 벚나무가 다 베어져 황량한 벚꽃동산에 쓰러져 잠드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누군가는 소중한 것을 상실하고, 누군가는 성취를 이루는, 인물들의 지난하고 복잡한 삶으로 빠져들다가 막바지에 ‘이 모든 게 그저 한바탕 꿈이 아닐까’하는 관조로 극을 되돌아보게 한다.

대학로 골목의 풍경을 찍은 영상이 극의 처음과 마지막 배경으로 투사된다. 관객이 19세기 말 러시아를 보면서도 ‘현대 한국’이란 시공간을 극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들여오게 하려는 의도다. 이 대목에서 라네프스카야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벚꽃동산’은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시절 품었던 꿈, 추억이 어려 있지만 쓸모를 다해 버릴 수밖에 없는 옛 가구 등 사라져가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 확대된다. 연극은 소중하지만 소멸하는 것들을 환기시킨다.

중견 배우 이지하가 라네프스카야를, 지난해 서울연극제 연기상을 받은 이태형이 로파힌을 맡아 인물들의 내면을 세심하게 드러낸다. 7일까지, 2만~5만원.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