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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변변한 논밭 하나 없는 만경강 언덕 자투리 땅, 판잣집 수십채가 모여있는 마을. 사람들은 ‘하루 벌이’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자식들은 타지로 떠났고, 마을엔 인적이 뜸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비비정(飛飛情) 마을. 근처에 있는 정자 ‘비비정(飛飛亭)’에서 이름을 따온 이 곳의 한 농가 식당과 어머니들 얘기를 풀어본다

◆가난한 마을, 다시 태어나다
국내판 윤식당…레스토랑 셰프가 된 '건달 할매들'
요즘 마을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주말이면 곱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마을엔 생기가 돈다. 마을 한 켠, 한갓진 곳에서 결혼식이 열리기 때문이다.
장소는 농가 식당의 넓은 앞마당. 피로연 음식은 마을 어머니들이 만든다. 서빙하는 사람은 뒷마을 총각과 아주머니다. 언덕에 있는 농가 레스토랑에 들어서면 친숙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화려한 화환 대신 소박한 나무며 들꽃들이 신랑 신부를 축하한다.

“비비정은 정해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시간이며, 방식이며 신랑 신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요. 얼마 전에 결혼하신 분은 신랑분이 목공을 취미로 했어요. 그래서 버진로드, 아치 장식 같은 걸 신랑이 직접 만들어서 마당을 꾸몄어요. 일반 웨딩홀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죠.” (비비정마을협동조합과 협약을 맺은 웨딩업체 메리앤비의 황재헌 대표)

배우 원빈과 이나영의 강원도 정선 ‘밀밭 웨딩’이 2015년. 그 이후 ‘찍어낸 듯한’ 웨딩홀 예식 대신 농촌을 찾는 신부, 신랑이 늘어났다. 원빈과 이나영은 가족들과 소박한 결혼식을 치렀다. 50여명의 하객들에겐 가마솥에서 직접 끓인 국수를 대접했다.

◆동네 할머니들이 꾸미는 피로연
국내판 윤식당…레스토랑 셰프가 된 '건달 할매들'
이 비비정 결혼식이 인기있는 진짜 이유가 있다. 마을 할머니들이 만들어주는 피로연 음식이다. 마을 부녀회관 사람들이 손수 딴 나물, 직접 담은 메주며 된장으로 소박한 한식 밥상을 차린다. 향긋한 버섯전골, 고소하게 무친 콩나물 잡채 같은 것들이다.

일반적인 웨딩 뷔페와는 완전히 다르다. ‘나물 뷔페’에다 피로연 테이블엔 전골이 바글바글 끓는다.

요리를 책임지는 ‘총괄 셰프’는 비비정 마을의 정도순 씨(68)다. 최순덕(72), 김정순(69), 유남숙(59) 씨도 정 씨와 함께 주방을 지킨다. 네 어머니의 나이를 합치면 268세. 모두가 비비정 마을 주민이다. ‘할머니 셰프’들의 모습을 처음 본 하객들은 보통 어리둥절해한다. 하지만 음식을 맛보고 나선 금세 고개를 끄덕인다.

손님이 특히 많은 날은 마을 할머니들이 총동원된다. 마을회관에서 직접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만들어 레스토랑으로 가져오기도 한다. “얼마나 바쁜지 몰러. 매실 따서 장아찌 담그고, 나물 바로 뜯어서 잡채 무치고…. 우리는 조미료라곤 일절 안 쓴당게. 청국장이며 된장 간장 다 직접 담그니 이게 보기엔 별거 없어 보여도 정성은 엄청나게 들어가는거야.”(정도순 씨)

이들 비비정 어머니들은 워낙 괄괄한 성격 탓에 마을부녀회에서도 ‘건달 시스터즈’라고 불린다. 그래서 레스토랑의 컨셉도 ‘건달 할매들이 손수 만들어 내는 시골밥상’으로 잡았다.

◆어머니 인생 담긴 레시피
국내판 윤식당…레스토랑 셰프가 된 '건달 할매들'
이 피로연 음식은 그냥 요리가 아니다. 비비정의 기억과 주민들의 삶이 묻어나는 오래된 마을 밥상이다. 비비정은 삼례읍 63개 마을 중에서도 가장 가난했다. 주민들은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면서 하루를 버텼다.

마을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정부의 신문화공간조성사업 마을에 선정된 이후부터다. 60~70대 할머니들이 마을 주민의 대다수니 ‘농가 레스토랑’을 열어보자고 했다. “나도 ‘넘의 집살이’를 참 오래했다고. 그래도 음식 솜씨는 있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으. 평생 해온 게 그것 뿐잉게.”(정도순 씨)

배 곯던 시절, 그나마 식구들을 잔뜩 먹일 수 있었던 나물로 메뉴를 짰다. 마을 어머니들의 고된 인생이 담긴 레시피였다. 재료는 마을에서 나는 채소들로 했다. 농약 하나 안 묻은 유기농이다. 그렇게 레스토랑을 열었고,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마을을 찾기 시작했다. 지난 해부턴 주말에 결혼식도 한다. 외롭고 가난했던 비비정 마을이 어느새 ‘전국구 명소’가 됐다.

메뉴는 처음 식당을 열었던 2012년과 약간 달라졌다. 녹두청포묵의 인기가 좋았지만 최근 다른 메뉴로 바꿨다. 마을 주민들이 나이가 들어 손이 많이 가는 녹두 농사를 그만두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 대신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수육 같은 메뉴도 넣고, 주말 결혼식 때는 국수도 삶는다.

“요즘 같은 봄에는 주말마다 결혼식이 열려요. 오신 분들이 음식이 정겹다고 많이들 하십니다. 어머니들이 손녀 시집 보내듯 정성스레 하시니까요.”(강신우 비비정레스토랑 사무장)
국내판 윤식당…레스토랑 셰프가 된 '건달 할매들'
◆음식이 아니라 ‘인생’을 먹는 것

젊지 않은 나이에 잔치 음식을 도맡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식당을 찾은 손님이나 결혼식에 온 하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쌓인 피로도 씻긴다고 한다. 어머니들은 이 곳, 농가 식당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재능과 욕망, 열정을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전까지 식구들 먹이고, 자식들 기르느라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래서, 이곳의 밥상은 단순한 피로연 음식이 아니다. 어머니들의 고된 삶에 대한 보상이며 인정이다.

“예전에 우리 마을에선 어린애 소리가 하나도 나질 않았당게. 그런데 지금은 애들도 오고, 어른도 오고 그려. 즈어기 강원도 같이 멀리서도 오고. 그 분들이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감사하다고 하고 간단 말이여. 아니, 긍게 원래는 우리가 감사해야하는데, 그럼 그냥 몸둘바를 모르제. 몸은 너무 힘들어도 마음은 그냥 너무 감사혀. 그뿐이여.”(정도순 씨)

FARM 고은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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