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부터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시작하는 ‘박고석과 산’전에 전시될 박 화백의 ‘외설악’.
25일부터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시작하는 ‘박고석과 산’전에 전시될 박 화백의 ‘외설악’.
거대한 산세가 마치 군무(群舞)처럼 펼쳐진다. 산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산이 되는 경지를 꿰뚫은 예술가의 강건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백색 광채를 뿜어내는 화면은 녹색과 어우러져 야생의 뜨거움으로 번지며 숭고미를 만든다. 1세대 서양화가 고(故) 박고석(1917~2002·사진)의 1984년 작 ‘외설악’이다.

산에 열광하면서 그 영혼을 화폭에 담아낸 박 화백의 회화 세계를 재조명할 기회가 찾아왔다. 박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5일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박고석과 산’전이 막을 올린다. ‘범일동 풍경’ ‘소녀’ 등 1950년대 초기 작품부터 1960년대 추상화, 산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산을 모티브로 작업한 1970~1990년대 작품 등 전 생애에 걸친 40여점이 나와 작가의 예술적 위상을 음미해 볼 수 있다.

◆“산은 매력적이고 공감을 주는 진실”

산에 미쳐 산이 된 화가…거장 박고석을 추억하다
박 화백의 예술적 궤적은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한 몸이다.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 니혼대 미술과를 졸업한 그는 해방과 동시에 월남했다. 전쟁이 터진 뒤에도 한동안 서울에 머물다가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갔다. 1951년부터 1년간 부산공고 미술교사로 재직한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구호물자 시장에서 헌 옷을 팔거나 시계 행상, 밥장사를 했다. 이 와중에도 이중섭 김환기 등과 교류하며 그의 예술혼은 꺾이지 않았다. 범일동에 작업장을 짓고 거칠고 굵은 윤곽선으로 피란 시절의 암울한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1950년대 후반 한묵, 황염수, 이규상, 유영국과 함께 ‘모던아트협회’를 창립한 그는 판에 박은 듯한 사실주의 일변도에 염증을 느껴 추상미술 쪽으로 방향을 튼다.

한동안 추상을 시도한 그의 작품 세계는 그룹 활동을 접고 개인 작업에 몰두한 1960년대 말부터 꽃핀다. 1968년부터 전국 명산을 찾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산의 화가’가 됐다. 형식과 타협을 거부하고 스스로 택한 고립과 은둔 속에 오로지 ‘산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을 화폭에 풀어냈다.

박 화백의 산 그림은 다른 화가의 작품과 섞어 놔도 딱 ‘박고석 것’이라고 짚어낼 수 있을 만큼 체취가 독특하다. 작가의 말마따나 “산은 내 주변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공감을 주는 진실”일 만큼 섬뜩할 정도의 개성을 풍긴다. 오래 묵혀 발효하고 뭉그러진 색과 형태로 자신의 산에 대한 열망을 뒤섞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현실 저 너머의 산을 그렸다. 시인 고은이 지적했듯 산을 통해 동양정신의 매듭을 잇고, 거기서 얻어진 화면은 성악보다 우렁찬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산을 그린다기보다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는 동양정신을 산을 통해 불러냈다는 얘기다.

◆설악산에 1년간 살며 사생

홍익대, 중앙대, 세종대 교수와 국전추천 작가, 한국미술협회 고문 등을 지내면서도 그는 ‘가슴으로 산을 맞이하는 화가’의 삶을 견지했다. 그의 일상을 지켜본 부인 김순자 여사는 “남편은 설악산이 좋아서 1년간 거기서 살았다”며 “산의 영혼과 흔적을 찾아 ‘산의 화가’로만 남았을 뿐 그 어떤 장식의 말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림이란 영원히 원시적인 작업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아와 대상이 대면할 때의 생동감을 중시한다. 자연의 생동감을 전달하려는 궁리 끝에 찾아낸 것은 호흡과 터치 같은 ‘육체의 리듬’이다. 안일의 늪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늘 학생의 자세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 박고석. 산을 통해 순수하고 초월적인 정신을 열어젖히다 간 그는 한국 표현주의 미술의 희귀한 정신으로 남았다.

도형태 갤러리 현대 대표는 “유족은 물론 미술평론가(오광수 뮤지엄 산 관장, 서성록 안동대 교수)와 화랑 대표들(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 송향선 가람화랑 대표, 신옥진 부산 공간화랑 대표)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작품을 모아 어렵게 만든 전시”라고 설명했다. 다음달 1일에는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 4층에서 그의 예술을 조명하는 세미나가 열린다. 전시는 내달 23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