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경남 하동군 옥종면 편백나무 숲에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빗물을 한껏 머금은 편백나무들은 특유의 향을 내뿜으며 머리를 맑게 해줬다. 높이가 15m를 훌쩍 넘는 나무 20만그루가 펼치는 장관은 자연이 만든 게 아니다. 40여년 동안 이 숲을 가꾼 독림가(篤林家) 김용지 씨(90)가 한 그루 한 그루 정성들여 키운 것이다. 그는 30만㎡에 이르는 편백나무 숲을 2015년 하동군에 기부했다. 하동군은 올해부터 2019년까지 이곳을 편백림 휴양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김씨는 다리가 약간 불편해 보였지만, 지팡이에 의지해 다른 사람 부축 없이 천천히 걸었다. 그는 가만히 나무를 안으며 말했다. “내 몸과 영혼이 모두 이곳에 녹아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이곳이 좀 더 많이 개발돼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겠죠.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풍경과 공기는 나눌수록 좋은 것이죠.”

그의 인생사는 편백나무 숲의 아름다움과는 대조적이었다. 그의 삶은 곧 우리네 가난하던 시절과 일치했다. 나아가 이방인이 아니지만,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던 재일동포의 서글픔이 인터뷰 중간중간 배어 나왔다.

이국에서 가난의 고통 이기다

김씨는 1928년 하동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자신을 포함해 아홉 명에 이르는 형제자매는 제각각 흩어져 살았다.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서였다.

그는 12세 때 형이 있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세 살 아래 동생과 둘이 이국으로 떠나는 배를 탔다. “우리 형이 거기서 일했거든요. 저와 동생을 꼭 공부시켜 주겠노라고 일본으로 불렀죠. 그런데 우리 형제가 오사카로 간 지 몇 년 안 돼서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 길이 막막했죠.”

형이 숨진 당시 김씨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동생 학비를 지원했다. 그렇게 동생을 일본 명문 교토대 의대에 진학시켰다. 김씨는 “그때 어느 작은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그곳에서 밥 얻어먹고, 잠도 잤다”며 “하필이면 그 공장 맞은편에 고등학교가 있어서, 학생들 등교하는 모습을 보면 교문에 매달려 울다가 다시 일하러 가곤 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김씨는 택시회사, 고철 장사 등 11개 사업을 거치며 40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모았다. 같은 재일동포와 결혼해 3남1녀를 뒀고, 거류민단 교토지부장도 맡았다. 거류민단에서 일할 때 조총련계에서 보낸 조직폭력배로부터 ‘재일동포 북송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말도 말아요. 그때 조총련에서 재일동포들을 북한으로 보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는데, 민단에서 가면 안 된다고 계속 설득했습니다. 조총련에선 그게 보기 싫었던 거죠. 비록 몸은 일본에 있어도 마음은 조국에 있는 만큼 한국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었습니다.”

김씨는 1965년 일본 영주권을 포기했다. 이후 가족을 데리고 하동으로 돌아왔다. “사실 일본에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에선 외국인으로서 보이지 않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조센징이라고 욕먹고, 할 수 있는 일도 제한적이었거든요.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이왕이면 고향에서 좋은 일 하면서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그때만 해도 한국어를 거의 못했어요. 나도 그랬고. 돌아와서 한동안 ‘반쪽 쪽바리’라고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어쩌겠어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죠.”

30㎝짜리 묘목이 거대 숲으로

[人사이드 人터뷰] '조센징' 설움 달래려 고향에 심은 편백나무…전국민 쉼터 됐죠
김씨가 나무 심기에 관심을 둔 계기는 6·25전쟁 후 민둥산으로 변해 버린 고향 산천을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 보며 느낀 슬픔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나무를 원체 많이 베어간 데다, 전쟁 터지고선 군인들이 작전상 필요하다고 제초제를 하도 많이 쓰는 바람에 벌거숭이가 된 산이 많았다”며 “저 헐벗은 산을 어떻게 하면 푸른 산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일본에서 자주 본 편백나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가 편백나무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생명력이 강하고, 건축용 목재 및 수공예품 등 다른 용도로 쓸 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65년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숲을 가꾸려 산을 샀다. 국내에 편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지 보기 위해 경남 합천 해인사와 하동 쌍계사, 부산 범어사 등 편백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봤다.

“편백나무는 묘목 크기가 30㎝밖에 안 됩니다. 그게 최소 30년은 지나야 우리가 알고 있는 높이로 성장해요. 편백나무 숲은 100년 앞을 내다보고 조성해야 합니다. 높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그때부턴 나이테가 굵어지면서 나무둥치가 점점 커지거든요. 그러면 숲이 더 아름다워지죠.”

김씨가 처음 편백나무를 심을 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밤나무 감나무 같은 유실수(有實樹) 심기를 장려했기 때문이다.

“다들 과일나무 심겠다고 난리였는데, 일본에서 묘목 들여와서 한국에선 잘 못 보던 나무를 심으니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다들 한마디씩 했어요. ‘그러다 망하면 어쩌냐’부터 ‘고생해서 모은 돈 허투루 날리는 것 아니냐’ 등 별의별 말을 다 들었어요. 그래도 자신 있었습니다. 유실수는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벌레가 잘 꼬이고, 초반에 많이 죽어서 키우기가 은근히 까다롭거든요. 편백은 일단 심어 놓으면 알아서 잘 자랍니다.”

그는 “그때 저를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이 이젠 우리 숲에 와서 정말 좋다고 하면서 ‘당신이야말로 영웅’이라고 말하는데 ‘인생만사 새옹지마’란 말이 절로 떠올랐다”며 “나라를 위해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고 했다.

“죽는 날까지 숲 위해 살고 싶어”

김씨는 하동읍에서 하동시외버스터미널을 운영 중이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은행에 손을 벌려 본 적이 없다”며 “솔직히 사업성만 따지면 시골 시외버스터미널 사업이 무슨 돈이 되겠느냐 하겠지만, 그래도 이 터미널이야말로 고향 사람들의 귀한 교통편이 된다는 생각에 건물과 버스 관리를 더 철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이름이 새겨진 숲을 세상에 남기고 갈 수 있어서 행복한 삶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죽어서 저 숲을 남기는 셈이 되겠죠. 살아있는 마지막 날까지 숲을 위해 애쓰고 싶어요. 그게 제 도리라 생각합니다.”

■ 독림가는 어떻게 선정될까

소유산림면적·조림실적에 따라 선정…개인·법인 독림가로 구분


독림가(篤林家)는 ‘임업 및 산촌 진흥 촉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선정된다. 독림가로 정식 인정받기 위해서는 시·군 민원실에 관련 서류를 제출해 시장이나 군수, 도지사, 산림청장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독림가란 말 대신 모범 임업인이란 용어도 있지만, 업계에선 전자를 여전히 훨씬 많이 쓴다.

독림가를 선정하는 이유는 임업인의 권익을 증진하고 경쟁력을 강화하며, 숲이 조성된 지역 주민들이 쾌적하게 살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독림가는 개인과 법인으로 구분된다. 개인은 소유 산림 면적과 조림 실적에 따라 모범독림가와 우수독림가, 자영독림가로 나뉜다. 모범독림가는 300㏊ 이상 산림을 경영하거나 100㏊ 이상 조림 실적을 갖춘 이를 말한다.

우수독림가가 되려면 100㏊ 이상 산림을 경영하고 있어야 하고, 50㏊ 이상 조림 실적이 있어야 한다. 유실수(有實樹)는 20㏊ 이상이다. 자영독림가는 10㏊ 이상 산림을 경영하거나, 유실수를 5㏊ 이상 조림하면 선정 대상이 된다. 법인독림가로 선정되기 위해선 300㏊ 이상의 산림을 경영하거나, 조림 실적이 100㏊ 이상이어야 한다.

자영독림가는 시장, 군수가 인정한다. 우수·모범·법인독림가는 도지사에게 인정 추천을 받으며 우수독림가는 도지사가 인정한다. 모범·법인독림가는 산림청장에게 인정을 받는다. 독림가로 선정되면 각 시·도·군에서 사업비 보조 및 융자, 각종 기자재 알선 및 지원, 사업 자율성을 최대한 인증하는 등의 특혜를 받는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