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유성호텔 모습
▲1930년 유성호텔 모습
대전 유성구 노은동에는 대전선사박물관이 있다. 이 일대는 농사짓기에 좋은 분지인 데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갑천이 가까워 선사시대 유물이 지금도 출토되고 있다. 삼한시대 유성은 마한의 54개 부족국가 중 하나인 신흔국에, 백제시대에는 우술군 노사지현에 속했다. 유성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지리지》에 처음 등장했다.

유성온천은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 상세히 나와 있다. 유성현의 동쪽 5리 독지울에 온천과 집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유성현의 동쪽 3리에 온천이 있어 조선 태조가 계룡산에 대궐터를 잡으려고 했을 때와 태종이 임실현에서 강무(講武·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를 마치고 목욕했다고 기록돼 있다.

유성이 명당(明堂)이라는 기록도 많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유성을 가거지(可居地·살만한 땅) 중에 으뜸가는 한 곳이라고 기록했다. 조선시대 민간 예언서인 《정감록》에도 유성은 ‘계룡산 자락 피난골’로 표현돼 있다.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땅이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