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사를 내 손으로 쓴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김영삼 전 대통령)” “황혼은 찾아왔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려 한다. 역사에 바치는 마지막 의식으로…(김대중 전 대통령)”

두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적 소명의식, 비장감이 묻어난다. 회고록은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을 적은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직위에 있었거나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의 회고록은 사료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대통령 등 정치인들의 회고록은 ‘양김(金)’의 이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출간될 때마다 파문을 일으켰다. 자신의 재임 중 국정에 대한 반성과 성찰 보다 전직 또는 후임 정권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뒀기 때문이다. 진영간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10명 가운데 이승만·박정희·최규하·전두환(자서전 준비)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6명이 회고록을 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자금,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를 각각 터트려 거센 후폭풍을 불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이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내용들을 담아 서로간 공방을 벌였다.

전직 대통령 가운에 회고록을 처음 낸 사람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다. 1991년 출간된 외로운 선택의 나날이란 제목의 회고록에서 윤 전 대통령은 “내 청와대 생활은 거짓 없이 바늘방석에 앉은 격이었다”고 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되는 과정에서 겪은 심적 고통을 주로 담았다. 책이 나온 시점이 5·16군사정변이 일어난지 30년 가량 지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의 정변 주역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은퇴해 큰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18년만인 2011년 펴낸 《노태우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게 대선 자금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폭로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 막바지에 김영삼 후보로부터 자금이 모자란다는 SOS(긴급요청)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이어 “금진호 상공부 장관과 이원조 의원을 통해 2000억원을, 대선 막판 김 후보 측에 직접 1000억원을 지원했다”고 실토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권력을 향해 하나에서 열까지 투쟁하는 자세가 변함이 없었다. 진지한 면 보다 피상적으로 접근했다”고 비판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전 정무장관도 2005년 펴낸 회고록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1989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한 사실을 밝혔다. 수표 일련번호와 은행 담당자 이름도 공개했다. 김 전 대통령 측에선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역대 대통령을 혹평했다. 2000년 1월 나온 김영삼 회고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부정부패의 원조’로 묘사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에 대해선 “헛된 욕심과 좁은 시야에 갖혀 민주화를 지연시켰다”고 평가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박정희에게 탐욕스런 권력욕만 배웠다”고 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선 “정보정치를 통해 나에 대한 견제에만 골몰했다”고 비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선 “역사적 소명에 대한 판단착오를 일으켰다”고 했다. 1987년 대선 후보 단일화 무산 책임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대중씨의 부정축재를 수사하게 되면 그의 구속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라도 지역은 물론 서울에서도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럴 경우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 없게 될 것은 뻔한 이야기였다. 김태정 검찰총장을 불러 수사를 유보하라고 지시했다. 김대중씨를 만났다. 신한국당의 비자금 폭로 이후 다섯 번에 걸쳐 나와의 면담요청을 해놓고 있었다. 김대중씨는 비자금 수사를 유보한데 대해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김대중씨는 나에게 ‘감사합니다’는 인사를 수없이 했다”고 기록했다. 이 같은 회고록 내용에 대해 2001년 2월 김대중 정부의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을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이라는 부제를 달았듯, 상당부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문민정부’를 열었다는 자부심을 담았다. 통영중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옮길 때 설탕부대에 구몽을 뚫었다는 내용 등을 소개하며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투쟁가로 그리기도 했다. 재임시절 하나회 숙청, 안전가옥 철거,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실시 등 자신의 치적을 중점적으로 쓴 반면 자신의 퇴임을 앞두고 터진 외환위기 사태에 대해선 소홀하게 다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김대중 자서전》은 사후인 2010년 7월 출간됐다. 자신의 성장 과정과 민주화 투쟁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했다. 그는 서자였음을 털어놨다. 2004년 8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찾아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적을 놓고 사과 한 것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이 살아 돌아와서 화해를 한 것 처럼 기뻤다”고 해 화제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선 “건설회사식 안하무인 태도를 드러냈다, 냉정적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비판했다.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2년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 등 3당 합당을 민심에 대한 쿠데타라며 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를 비판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였다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도 소개했다. 1974년 가택연금 때 부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며 박 전 대통령에게 “왜 그리 모질게 굴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1992년 대선 즈음 노태우 당시 대통령으로 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도 고백했다. 아들의 정치자금 수수 문제에 대해선 간략하게 넘어간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은 집필 도중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2009년 9월 출간됐다. ‘난 실패한 대통령’, ‘참여정부는 절반의 성공도 못 이뤘다. 무리한 욕심이 실패와 오료의 원인이다’라고 스스로 자책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는 “정수장학재단은 장물”이라며 “그 주인이 정권을 잡겠다고 한다”고 비판했다. 또 “부동산은 비틀거리며 겨우 밀고 갔다. 이제 다 무너지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겨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의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을 ‘통치행위론’으로 막으려 했던 사실도 소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 스스로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한 탓에 통치행위론으로 특검을 막으려던 근거가 사라졌다”고 기술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황당하고 불쾌하다”고 반박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지역주의를 막아내지 못한 책임은 부인할 수 없다”면서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웠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은 3당합당으로 민주세력의 통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철새정치로 한국정치의 흐름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다”고 비판해 상도동 측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회고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6·15선언은 빈 선전갑’이라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발언을 공개해 김 전 대통령 측과 마찰을 빚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 2년만인 2015년 2월 《대통령의 시간》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4대강 사업과 자원개발 외교, 남북 정상회담 추진, 세종시 수정안,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과정 등과 관련한 드러나지 않았던 내용들을 담았다. 2009년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비밀 회담을 가지는 등 정상회담 성사가 거의 9부 능선을 넘는 단계까지 갔다고 기술돼 있다. 북한이 정상회담 조건으로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1억 달러), 국가개발은행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 제공 등을 주장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정상회담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북한이 중국 등의 간접경로를 통해서도 다섯 번이 넘는 정상회담 제의를 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이 전 대통령은 “김종훈 (노무현 정부)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쇠고기를 월령 제한없이 수입하겠다는) 이면합의를 했다’고 보고했다. 미국은 그 합의를 지키라고 압박했다”고 소개해 이명박-노무현 정권 측이 충돌했다. 이 전 대통령은 “내가 세종시 수정을 고리로 정운찬 총리 후보자를 2012년 여당의 대선 후보로 내세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됐다. 박근혜 전 대표 측이 끝까지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한 이유도 이와 전혀 무관치는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적어 전·현 정권이 갈등을 빚었다.

이렇게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은 정치 철학이나 정책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성찰을 하고 역사를 정리해 후대에 교훈으로 삼으려 하기 보다는 폭로전으로 흘렀다. 전문가들은 진영간의 첨예한 대립과 권위주의 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자서전 집필 작업은 보통 대통령으로 모셨던 참모들이 중심이 돼 진행됐다. 모셨던 ‘주군’을 띄우고 정치적 행위를 합리화 하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린 것이다. 회고록은 한 개인의 삶을 다룬 만큼 자신의 가치관과 입장이 반영될 수 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도 있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