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경제 위기와 위기의 경제학
토머스 쿤에 따르면 과학자들의 인식, 이론, 신념, 가치 등의 집합을 의미하는 패러다임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상(異常) 현상(anomaly)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존 패러다임을 수정·보완해 이상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면 패러다임은 바뀌지 않고 이른바 정상과학(正常科學)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한다. 반면에 정상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이상 현상이 축적되면 정상과학은 위기에 봉착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계기가 마련된다. 위기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존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대체하고 정상과학의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상과학의 지위를 차지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로 인해 일부 또는 전부가 훼손되는 기존 패러다임의 저항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패러다임이 이상 현상을 끝내 설명하지 못하면 과학자들은 하나둘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거해 연구하게 된다. 옛것을 끝까지 고수하는 과학자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제학에서도 그런 이상 현상이 존재한다. 거시경제학은 1930년대의 대공황을 계기로 생겼지만 대공황의 원인과 처방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도 마찬가지다. 금융위기의 경우, 고작 제시되는 진단은 규제 완화와 정부의 조정 실패다. 뒤따른 처방이 재정 투입 확대와 양적완화지만, 자본 이론이 없는 거시경제학으로서는 저금리 정책에 따른 생산과 소비구조 간의 괴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상 현상이고 위기의 징표다. 더 큰 규모의 재정 투입과 양적완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도리어 그런 위기의 증거다.

시장에 존재하는 기업의 수와 각각 또는 집체적 시장점유율을 기준으로 독과점과 경쟁의 정도를 판별하는 시장구조론은 미시경제학 패러다임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문제는 대체재가 널려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 세계에서 특정 시장을 과학적으로 획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정 시점에서의 권역별 시장점유율을 기준으로 SK텔레콤-CJ헬로비전의 합병이 경쟁 제한적 독과점을 형성한다는 판단 아래 이를 불허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최근 결정이 그런 오류의 사례다. 시장구조론으로는 역동적인 과정으로서의 기업들의 경쟁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 이상 현상이며 위기의 징표다.

최근 야당이 발의한 상법개정안은 어떠한가? 이사 선임 시 대주주의 의결권 제한과 집중투표제와 주주대표소송제 도입 및 의무화 등은 주식회사 제도 운행 원리에 대한 기존 패러다임의 빈곤한 이론 탓이다. 그 원리는 대체로 이렇다. 회사 내의 의사결정권은 대주주를 비롯한 소수의 대표단에 위임해 의사결정 비용을 낮추고,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않은 여타 주주들은 대표단의 의사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팔고 떠나거나 아니면 주주총회에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타 주주들, 특히 소액주주들은 보통 비용이 적게 드는 떠나는 방법을 택한다. 물론 이는 현 미시경제학을 수정·보완해 수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장구조론과 경제력 집중 문제에 얽매인 나머지 수정·보완 작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주류 경제학이 이런 이상 현상을 끝내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그 상당 부분은 폐기 운명을 맞을 것이다. 운 좋게도 경제가 회복되고 난 뒤, 이를 그동안의 진단과 처방에 거꾸로 두루뭉술하게 끼워 맞추는 식으로는 정상과학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불확실성 아래에서 행동하는 인간은 없고 경쟁을 통해 발견해야 할 모든 사항이 이미 알려져 있다는 가정 아래 잘 프로그램한 기계 장치가 돼버린 주류 경제학 패러다임은 상당 부분 수정·보완이 불가능한 것 같다. 장기적으로 정상과학의 지위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행동하는 인간을 탐구하는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의 모색이 절실해 보인다.

김영용 < 전남대 교수·경제학 yykim@chonna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