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스페인 왕실·영국 버킹엄 궁이 반했다…햇볕과 시간이 빚어낸 '축복의 와인'
와이너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미식과 여행의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푸른 자연과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는 와인을 맛보면 일상의 피로가 싹 날아가 버린다.

스페인에는 유명한 와인 산지가 많다. 그중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길다는 두에로 강 주변의 ‘리베라 델 두에로’는 최상급 와인 산지로 꼽힌다. 리베라 델 두에로 와인은 원색적이지만 우아하고, 거칠면서도 고혹적이다. 길게 이어지는 와인 지대는 포도밭, 밀밭, 보리밭, 양귀비 꽃밭과 어우러지며 바다처럼 펼쳐진다.

리베라 델 두에로는 와인뿐만 아니라 많은 유적과 좋은 날씨 등 여행지의 매력도 두루 갖췄다. 바람에 풍화된 로마 시대 군사 요새 흔적이나, 고지대에 거친 암석으로 지은 중세의 성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선 해가 오후 10시쯤 지기 때문에 낮이 무척 길다. 시간이 넉넉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광활한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은 숨 막히도록 아름답다.

스페인 왕실에 와인 공급하는 가르시아 가족

수도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약 176㎞ 떨어져 있는 리베라 델 두에로(Rivera del Duero)는 바야돌리드, 부르고스, 세고비아, 소리아 4개 주에 걸쳐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도착 후 도시 중심부인 아란다 데 두에로(Aranda de Duero)에 여정을 풀었다. 바야돌리드와 부르고스를 연결하는 대로에 있는 호스텔 겸 레스토랑 ‘엘 벤토로’에 나흘 동안 머물기로 했다. 이곳을 운영하는 가르시아 가족은 직접 포도를 키우고 와인을 만든다. 스페인 왕실과 영국 버킹엄 궁에도 와인을 공급할 정도로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 중이다.
바야돌리드의 페냐피엘 성
바야돌리드의 페냐피엘 성
미국 와인전문지 ‘와인 엔수지애스트(Wine Enthusiast)’에서 여러 차례 메달을 수상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와이너리 이름은 ‘리나헤 가르세아 보데가스 & 비네도스’다. ‘가르시아 가문의 양조장과 포도밭’이란 뜻이다.

호스텔 건물 뒤로 50~60년 전의 철길이 지나고, 말이나 당나귀가 끌던 옛날 와인 운반용 수레와 포도 압착기가 놓여 있다. 그 뒤로 포도밭이 이어지고 양조장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와인은 병에 넣기 전에 미세한 잔여물을 걸러내기 위한 여과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이곳 와인은 본연의 색과 맛을 간직하기 위해 여과 과정을 생략한다. 언필터드(unfiltered) 와인이다. 수출 담당자 후안 가르시아는 “여과하는 대신 출시 전인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새것으로 바꿔서 미세한 침전물을 제거한다”고 했다. 같은 방식으로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는 여럿 있지만, 비용을 들여 코르크를 사용하는 곳은 적다. 정성 들여 만든 이곳의 와인은 짙고 농밀한 풍미를 지녔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와인은 저녁 내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죽 통에 담긴 와인을 맛보다

리나헤 가르세아 와이너리의 와인메이커
리나헤 가르세아 와이너리의 와인메이커
다음날엔 와이너리의 재정 담당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가 특별한 제안을 했다. 지역 전통의 지하 와이너리에 가보자는 것이다. 아란다 데 두에로에는 여러 개의 지하 와이너리가 있다. 기온이 높고 여름에 해가 긴 지역이기 때문에 태양과 열을 피해 지하에 와이너리를 지었다.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있는데 들어가니 서늘한 기운에 몸이 떨렸다. 기록에 따르면 아란다 데 두에로에는 300여개의 지하 와이너리가 있었다. 수확기, 포도주 축제 기간, 와인 출하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생산자들은 지하에서 와인을 만들며 지냈다.

지하 와이너리 이름은 ‘보데가 엘 로메욘’이다. 약 500년 전 지하 10㎞ 아래에 7㎞ 길이로 건설됐다. 내부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발효 탱크 및 오크통과 와인 병들이 보존돼 있다. 지상으로 연결된 통풍구는 굴뚝 같은 역할을 했다. 포도를 발효할 때 생기는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내보내고, 어두운 지하에서 초를 밝힐 수 있도록 산소가 유입되는 통로였다. 이곳을 소개하던 가브리엘은 “귀를 기울이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동굴을 따라 길게 뻗은 식탁에서 소가죽 통에 담긴 와인을 마셨다. 유리병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동물 가죽에 술을 보관했다. 옛날 방식으로 한 손으로 입구를 잡고, 다른 손으로 소가죽 통을 잡은 뒤 와인을 맛봤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 스페인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유서 깊은 대지와 유적들이 산재한 곳

가르시아 가문의 선조들은 와이너리를 방문한 사람들이 와인과 음식은 물론 지역의 역사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가브리엘은 그 뜻을 이어 와이너리에 손님이 찾아오면 함께 주변 유적 탐방에 나서고 있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 학위를 따서 인근 성이나 수도원 일을 맡고 있을 정도로 전문적이다.

호스텔 겸 레스토랑 엘 벤토로에 머물면서 고대와 중세의 유적을 원 없이 돌아봤다. 고딕부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축적된 ‘산타 마리아 드 라 비드 수도원’,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페냐란다 성’도 방문했다. 북동쪽의 마을 칼레루에가에서는 로마 시대 유적도 볼 수 있었다. 붉은 흙과 연둣빛 포도밭 너머로 무너진 로마 시대 성벽 일부가 남아 있었다. 예전에는 로마 시대 전사들의 주둔지였던 곳이다. 당시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요새나 탑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15세기 무렵까지 여러 영주와 왕이 살던 성벽과 집터의 잔해도을 수 있다.

경사진 밭 아래에는 1세기 때 만들어진 동굴 와이너리가 있었다.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179년이다. 당시 지하 와이너리는 알폰소 8세(재위 1158~1214년) 소유였기 때문에 문헌에는 이름이 ‘보데가 데 알폰소 Ⅷ’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와이너리 입구는 동굴 형태로 생겼는데 높이는 5m, 길이는 30m 정도다. 중앙의 긴 복도 양옆으로 발효조와 항아리를 보관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개수대와 돌을 깎아 만든 수도꼭지 형태도 보였다. 조사 결과 로마 시대 건축 및 도로 구조와 일치했다. 돌아오는 길에 자연의 맨살을 그대로 드러낸 ‘예클라 협곡’을 만났다. 석회석 절벽의 장엄한 골짜기와 굽이치는 물살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자전거로 포도밭을 둘러보며 소풍을
바야돌리드의 발부에나 수도원
바야돌리드의 발부에나 수도원
바야돌리드에는 미리 예약만 하면 자전거로 포도밭을 둘러보고 소풍을 즐길 수 있는 와이너리가 있다.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베가 시실리아’ 와이너리와 이웃의 ‘핀카 비야크레세스’다. 핀카 비야크레세스 와이너리와 포도밭은 두에로 강 앞에 놓인 탁 트인 대로에 넓게 뻗어 있다. 포도밭 뒤로 와이너리 건물보다 높이 솟은 노송(老松)들이 숲을 이뤘다. 소나무 숲은 강에서 불어오는 찬 공기로부터 포도를 보호한다.

핀카 비야크레세스 박물관에 있는 와인
핀카 비야크레세스 박물관에 있는 와인
핀카 비야크레세스는 14세기에 설립된 수도원이었다. 현재 이름은 창립자인 수도사 이름에서 유래됐다. 1836년 스페인 왕실은 성직자의 재산 상속을 폐지했고 수도원은 본래 기능을 잃었다. 지금 비야크레세스를 소유하고 있는 곳은 스페인 여러 지역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기업인 아르테비노(Artevino)다. 덕분에 이곳에서는 리베라 델 두에로 지역의 와인뿐만 아니라 리오하(Rioja), 토로(Toro), 루에다(Rueda) 등에서 생산 중인 아르테비노의 와인을 함께 시음할 수 있다.

와인 박물관이 있는 페냐피엘 성

두에로 강 북서쪽의 ‘발부에나 수도원’은 포도밭과 수도원이 그림 같이 겹쳐지는 곳이다. 에스파냐 중북부의 도시 바야돌리드에서 동쪽으로 46㎞ 떨어져 있다. 이곳에선 시토회 수도사들의 검소했던 삶을 엿볼 수 있다. 내부는 지나친 장식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장에서 빛이 들어오면 성스러운 분위기를 이루도록 설계됐다. 역사학적인 의미도 큰 곳이다. 700년 전 증축된 예배당에선 알폰소 7세(재위 1126~1157년)가 이슬람 세력과 전투를 벌였던 내용을 담은 벽화가 발굴됐다.
핀카 비야크레세스의 와인저장고에 보관된 와인원액
핀카 비야크레세스의 와인저장고에 보관된 와인원액
바야돌리드 최대의 명소는 11세기에 건축되고 15세기까지 증축된 ‘페냐피엘 성’이다. 다듬지 않은 돌을 쌓아 올려 지었다. 그 거친 풍광은 보는 이를 단번에 압도한다. 34m 높이의 탑에서 바라본 성벽은 수평선과 평행을 그린다. 숨죽이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전율이 느껴졌다. 성 내부는 이 지역 와인의 역사를 소개하는 ‘주립 와인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료와 전시품이 많은 데다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서 이 지역 와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출구에 자리한 시음 코너에서 와인을 마셨다. 지난 며칠간 이어진 여행의 추억이 그 한 잔에 고스란히 담긴 듯했다.

부르고스(스페인)=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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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델 두에로에서는 스페인 토착 포도 품종인 템프라니요를 주로 사용한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템프라니요는 껍질이 두껍고 색상이 짙다. 이를 사용한 와인은 매우 우아하고 농밀한 느낌을 준다.

추천 와인은 따로 있다. 리나헤 가르세아(linajegarsea.com)에서는 ‘세뇨리오 데 칼레루에가(Senorio de Caleruega)’를, 핀카 비야크레세스(villacreces.com)에서는 ‘네브로(Nebro)’를 선택하면 좋다. 리베라 델 두에로 와인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와이너리 투어와 와인에 관한 정보는 각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밖의 정보는 리베라 델 두에로 와인 여행 사이트(rutadelvinoriberadelduero.es)와 리베라 델 두에로 와인 협회(riberadelduero.es)에서 볼 수 있다.

여행 정보

리베라 델 두에로 지역에서 교통이 가장 편리한 도시는 바야돌리드다. 라이언 에어(ryanair.com)가 바야돌리드 공항에서 스페인 대도시 및 가까운 유럽 주요 도시로 운항하고 있다. 마드리드에서 이동할 경우 고속열차 아베(AVE)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차마르틴(Chamartin)역에서 바야돌리드까지 한 시간이면 닿는다. 바야돌리드에서 부르고스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마드리드에서 부르고스로 갈 때는 차마르틴역에서 일반열차로 약 네 시간, 알사 버스터미널(alsa.es)에서는 버스로 약 세 시간 걸린다.

도시 간 버스 운행 정보는 종합버스정보사이트(estacionautobuses.es)를 참고하면 된다. 그 밖의 여행 정보는 카스티야 이 레온 관광안내소(turismocastillayleon.com)에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