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구의 교육라운지] 너무도 달랐던 세 아이의 삶
여기 세 아이가 있다. 한두 살 터울 또래 아이들이다. 불행히도 한 아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같은 하늘 아래, 동시대에 태어나 자랐지만 아이들의 삶은 너무도 달랐다.

아버지에 의해 훼손된 시신으로 발견된 소년 A군. 그 아버지의 진술대로라면 4년 전 4월 학교에서 사라졌고 그해 11월 숨졌다. 힘겹고 짧은 삶을 마친 작은 육신은 죽어서도 안식처를 얻지 못했다. 수년간 집안에 냉동 보관됐다가 지난 15일에야 발견됐다.

한 달쯤 전 일도 아직 생생하다. 11살 소녀 B양이 세상에 나왔다. 역시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자취를 감췄다. 집에 가둬놓고 굶기고 때리는 아버지를 피해 맨발로 탈출했다. 발견 당시 몸무게는 4살 아이 평균인 16kg이었다. 집으로 보내질까 무서워 “고아원에서 나왔다”는 슬픈 거짓말까지 했다.

전혀 다른 삶도 있다. C양은 좋은 직장의 강남토박이 부모와 할마(할머니+엄마) 밑에서 자랐다. 할마는 지극정성 혹은 극성으로 아이를 키웠다. 손녀가 신생아일 때부터 하루종일 책 읽어주느라 목이 쉬곤 했다. 공부머리를 틔워주려고 그랬다. C양은 자라면서 온갖 학원과 영재프로그램을 섭렵했다. 같은 11살짜리의 성장기다.

뉴스를 접하며 가슴 아프고 화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것이다. 어째서 이 아이들은 이토록 극과 극의 삶을 살아야 했을까. 누구라도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그래서 부모 잘 만나야 한다”는 수저계급론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 보살핌 받아야 할 아동의 권리, 최소한의 안전망으로서의 교육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은, 현상에 대한 분노를 넘어 현실적 대안을 내놔야 한다.

/ 한경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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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학교 개념이 자리잡으면서 전통적 의미의 가정교육은 대부분 학교로 위임되거나 이양됐다. 그런데 최근의 아동학대 사건을 보면 이 위임·이양 과정의 실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학교와 교사는 무력했다. 장기결석 아동의 부모를 찾아가거나 전화해 이유를 물어도 소용없었다. ‘집밖’의 구출 시도는 “집안일에 참견 말라”는 전근대적 인식의 벽 앞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분명히 하자. 가두고 굶기고 때리고 목숨까지 빼앗는, 그리하여 부모가 양육자이길 스스로 포기할 때 학교와 사회는 아이를 ‘집’이란 이름의 질곡에서 꺼내어 거둬들일 의무가 있다.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인 신의진 의원(새누리당 아동폭력조사위원장)은 장기결석 아동 전수조사 방침을 밝히며 “선진국에선 아이가 학교에 30분만 늦어도 부모에게 연락하고 한 시간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 경찰이 출동한다”고 전했다.

알다시피 의무교육은 보편성에 토대를 둔다. 아이들이 환경적 요인에 의해 시작부터 뒤처지지 않도록 한 사회적 합의다. 교육이 학교에서의 학습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면, 이런 방침은 아이의 가정환경에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 정상적 교육과 양육을 받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을 경우 거기서 벗어나도록 하는 게 오히려 ‘같은 출발선’일 수 있다.

강제력을 담보한 사회적 개입을 능사로 볼 수는 없다. 인식 개선이 광범위하게 선행돼야 함이 물론이다. 다만 당장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필요해보인다. 신 의원이 언급한 ‘선진국 사례’ 몇을 소개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공개한 해외의 결석아동 대응 현황에서 추렸다.

미국은 무단결석을 위법행위로 적시해 소년법원 관할 하에 재판을 받도록 한 ‘무단결석법(Truancy law)’을 도입했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선 3일 이상 무단결석시 법정 소환된다. 유죄 판결을 받으면 무단결석 하루에 300달러(약 36만원)씩 벌금을 문다. 플로리다주는 무단결석에 대한 학교 중재에 불응시 소년재판부에 넘겨진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라는 판결을 따르지 않는 보호자는 6개월 구금 또는 500달러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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