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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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의 아버지’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49)는 ‘한국의 스티브 잡스’로 통한다. 게임 개발 1세대인 송 대표는 1994년 김정주 NXC(넥슨지주회사) 회장과 손잡고 게임 개발사 넥슨을 창업했다. 세계 최초 PC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를 개발하던 중 사소한 말다툼 끝에 1996년 말 넥슨을 나왔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의 제안으로 1997년 말 엔씨소프트에 입사해 최고 흥행작 중 하나인 ‘리니지’를 개발했다. 하지만 ‘리니지2’ 개발 과정에서 2003년 회사를 그만뒀다. 경영권 분쟁으로 자신이 창업한 애플을 그만뒀던 스티브 잡스와 비교되는 이유다. 송 대표는 굴지의 흥행대작 개발을 주도하고도 게임 제작사를 두 번이나 그만뒀다. 운기조식(運氣調息)하다가 지난 5년 동안 공을 들여 개발한 게 ‘문명 온라인’이다. 리니지처럼 흥행몰이를 할 수 있을지 설렌다고 한다. 김정주 회장은 최근 펴낸 책 《플레이》에서 그에게 ‘한국의 제임스 캐머런’이란 타이틀을 하나 더 얹었다. 송 대표가 (‘타이타닉’ ‘아바타’ 등 대작 영화의 감독을 주로 맡은 캐머런처럼) 대작 게임을 개발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송 대표와 김 회장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 동기다.

경영보단 개발에 매력

송 대표는 첫인상부터 창의성이 넘쳐나는 듯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검은테 안경, 턱수염과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 그랬다. 직원이 500명에 달하는 회사 대표라기보다는 KAIST 연구실이나 넥슨 창업 초창기 사무실(서울 역삼동 성지하이츠 오피스텔)에서 먹고 자면서 개발에 몰입하던 개발자 모습에 가까웠다. “개발자 출신이 경영하는 데 어려움은 없느냐”고 묻자 “개발이 더 좋아요”란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남들이 매일 한다는 면도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다고 한다. 게임 개발은 그의 천직이다. 의사결정을 위한 회의를 피할 순 없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 개발에 할애한다. 대표 집무실도 개발실로 둔갑했다. 작년 9월부터 송 대표를 포함한 개발자 6명이 대표 집무실에 모여 모바일게임을 개발하고 있다.

코딩 재미 말로 표현 못해

개인적으로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서 프로그래밍을 하기도 한다. 프로그래밍 자체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한자리에서 수천 줄의 코딩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다.

송 대표는 1990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뒤 KAIST 전산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길남 KAIST 명예교수 밑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았다. 유닉스 운영체제에서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터미널 프로그램인 ‘한텀’도 그 시절 ‘취미 코딩’을 통해 개발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착실했던 프로그래머 지망생은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게임 개발자의 길로 뛰어들었다. 1992년 당시 KAIST 재학생 사이에서 유행하던 ‘머드 게임’을 처음 접한 것. 머드 게임은 채팅을 융합한 롤플레잉(역할수행)·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당시 텍스트로만 돼 있던 게임에 그래픽을 더해 탄생한 게 ‘바람의 나라’다.

그는 넥슨을 그만둔 뒤에도 처녀작인 ‘바람의 나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다. 넥슨 퇴사 후에 가끔 회사에 들러 ‘바람의 나라’ 프로그래밍을 하고 소스 첫 줄에 ‘written by Jake Song(송 대표의 영어 이름)’이라고 남겼다는 일화는 게임 개발자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다.

넥슨·엔씨소프트와 협업도 가능

송 대표는 “정주와는 요즘도 1년에 몇 번씩 만나서 소소한 개인사라든지 일상적인 얘기를 나눈다”고 말했다. 반면 김택진 사장과는 ‘이런 게임이 재밌다’ ‘업계가 이상하게 변했는데 형이라도 잘해보세요’ 등 업계 현안에 대한 고민을 주로 털어놓는 관계라고 했다. 송 대표와 김택진 사장은 서울대 공과대학 선후배 사이다. 송 대표가 한글과컴퓨터에 다니던 1993년 무렵 처음 만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넥슨을 나온 뒤 ‘리니지’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택진 사장이 그를 엔씨소프트로 불렀다. 요즘에도 송 대표는 당시 ‘리니지’ 기획서를 가끔 들춰본다. 잃어가는 초심을 되새길 수 있어서다.

넥슨이 지분을 정리하면서 마무리된 넥슨과 엔씨소프트 간 갈등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송 대표는 “세월이 지나면 두 사람이 다시 친해질 것”이라며 웃었다. 그도 넥슨, 엔씨소프트 퇴사 결정 당시엔 의견 충돌이 있어 회사를 나왔지만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넥슨 또는 엔씨소프트와 협업할 가능성을 묻자 “당장은 (협업할) 생각이 없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라며 여지를 남겼다.

“송재경표 게임 내놓겠다”

송 대표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지만 게임 개발에 있어서만큼은 완고하다. 예를 들어 ‘바람의 나라’를 개발할 때도 플레이어 대 플레이어(PVP), 플레이어 대 환경(PVE) 논쟁이 치열했다. 넥슨 초창기 개발자들은 ‘몬스터’ 같은 게임 환경과 대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 간 대전이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바람의 나라’에 도입하는 데 대한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넥슨을 나와 이용자 간 대전이 가능하도록 구성한 게임이 ‘리니지’다.

그는 게임에도 ‘작가의 색깔’이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 대표는 “봉준호 감독 영화라든지 고갱의 그림이라든지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며 “바둑과 장기처럼 상대방을 직접 제압하는 유형의 게임을 꾸준히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송 대표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게임사에 남을 게임’을 내놓고 싶다”고 덧붙였다. 온라인게임의 대중화를 가져온 ‘바람의 나라’ ‘리니지’에 이어 ‘문명 온라인’으로 천재 게임 개발자의 역량을 과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송재경 대표가 5년 만에 들고나온 ‘혁신’

온라인으로 부활시킨 대작 게임 문명
‘1주일 시간제한’ 둬 MMORPG 새 방향 제시


[人사이드 人터뷰]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고갱처럼 봉준호 감독처럼 '자기 색' 확실한 게임 만들고 싶어"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가 ‘아키에이지’의 후속작으로 고른 게임은 ‘문명’이다. 국내 게이머 사이에서 죽었단 의미의 ‘운명하셨습니다’와 미국 2K게임즈의 PC패키지게임 ‘문명’의 합성어인 ‘문명하셨습니다’란 신조어가 유행했을 정도로 인기를 끈 게임이라 개발 초기부터 관심을 모았다. 엑스엘게임즈는 최근 ‘문명’의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5년 동안 개발한 PC온라인게임 ‘문명 온라인’의 공개테스트(OBT)를 시작했다.

‘문명 온라인’은 2010년 송 대표와 문명 개발자인 시드 마이어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송 대표는 “마이어는 오랫동안 게임업계를 이끌어온 개발자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당시 ‘리니지의 아버지’와 ‘문명의 아버지’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다.

문명 개발사인 2K게임즈는 온라인 플랫폼으로 ‘문명’을 서비스하는 방안을 찾고 있었고, 엑스엘게임즈는 ‘아키에이지’의 후속작을 고민하던 터여서 ‘타이밍’이 좋았다. 송 대표가 문명 원작의 마니아였다고 한다.

‘문명 온라인’에 대한 송 대표의 기대는 남다르다. 인기 IP를 활용한 새로운 방식의 다중접속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문명 온라인은 시간 제한 없이 플레이하는 기존 MMORPG와 달리 1주일이란 시간 제한을 두고, 다수의 이용자가 게임에 참여해 승패를 가르는 게 특징이다. 이용자가 로마, 이집트, 중국, 아즈텍 중 한 개 문명을 선택, 해당 문명의 시민이 돼 자신이 속한 문명의 발전과 승리를 위해 게임을 한다. 1주일 동안 게임을 즐긴 뒤 특정 문명이 승리하면 세션이 끝나고 다음 게임을 하게 된다.

송 대표는 “게임 개발·운영사가 망하기 전까진 계속 서비스하는 기존 MMORPG와 달리 문명 온라인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문명 이용자의 명성, 스킬 등이 초기화된다”며 “MMORPG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추가영/이호기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