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 더 소설처럼 살다간 무명작가의 삶
종합문학지 현대문학 1955년 10월호에 한 신인 작가의 소설이 추천받아 실렸다. 제목은 ‘후천화일점(後天話一點)’. 소설가 김동리는 이 작품을 추천하면서 “문장도 천덕스럽지 않아서 좋다. 나는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통 알지는 못하나 앞으로 더욱 착실한 태도로 꾸준히 노력하면 유익한 작가가 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신인 작가의 필명은 최희성. 스무 살의 부산대 사학과 1학년생이었다. 한 번만 더 추천받으면 ‘추천 완료’ 형식으로 등단할 수 있었지만 그는 등단을 포기했다. 아홉 명의 동생을 먹여살리기 위해 상금이나 고료가 큰 공모전에 도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66년 한국일보 추리소설 공모에 ‘흙바람’으로 다시 한 번 당선됐다. 이 작품은 이듬해 이만희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었다. 이때 쓴 필명은 첫째 동생 이름인 최정협.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병역까지 기피해 본명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36년생인 그의 본명은 최명근(사진). 그는 1982년 경향신문이 주최한 2000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정막개전’이란 작품을 응모했다. 이때 쓴 필명은 최민조였다. ‘정막개전’은 연산군, 중종 시절의 노비였던 정막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정막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천한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전 공조판서 박영문과 전 병조판서 신윤무가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고발해 신분이 바뀐다. 그러나 그의 끝없는 욕심은 세상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결국 그 또한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정막개전’은 사학도의 작품답게 역사적 사실과 용어가 바르게 쓰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최명근은 공교롭게도 다시 한 번 김동리의 심사를 받게 된다. 김동리는 “전체적인 규모가 작아 대장편의 골격을 이룰 수 없는 것이 흠”이라면서도 “내가 본 한국의 여느 역사소설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호평했다. 소설가 박완서도 “정막개전은 실록에 기록된 사실에 충실하면서 소설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최종심에서 다른 작품과 경합을 벌여 아깝게 탈락했다.

최명근은 1986년 삼성문화재단 소설 공모에 최명진이란 이름으로 ‘자결고’라는 작품을 응모해 또 한번 당선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평생 미혼으로 살았던 최명근은 위암으로 1996년 세상을 떠났다.

소설보다 더 소설처럼 살다간 무명작가의 삶
최근 출간된 《정막개》(기파랑)는 ‘정막개전’을 다듬은 최명근의 유작이다. 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그의 매제인 김재환 한림대 영문학과 명예교수의 노력 덕분이다. 최명근의 동생 최정협이 보관하고 있던 원고를 세상을 뜨기 직전 김 교수 부인이자 최명근의 여동생인 예욱씨(68)에게 넘겼고 이를 김 교수가 컴퓨터에 입력, 파일로 만들었다. 최명근은 1250장이었던 기존 원고에 400여장을 추가해 작품을 완성했으나 공개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김 교수는 이 원고를 지인인 김선학 동국대 국문학과 명예교수에게 보내 평가를 부탁했고, 결국 책 출간으로 이어졌다. 소설 《정막개》는 그의 본명으로 만들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다.

김 교수는 고인에 대해 “소설에 열정을 지닌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아홉 동생에게 너무 신경을 써 몸을 망친 것 같아 안타깝다”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20년 동안 잠자다가 (세상에) 나오려고 하니까 이렇게 빨리 나왔는데….”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