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조사과장이 지난 3일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머리카락이 남은 채 발굴 6·25 참전용사 유해 사진을 가리키며 유해발굴 사업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eon@hankyung.com
이용석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조사과장이 지난 3일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머리카락이 남은 채 발굴 6·25 참전용사 유해 사진을 가리키며 유해발굴 사업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eon@hankyung.com
사륜구동 차량은 매년 6만㎞씩, 80만여㎞ 산길을 달려왔다. 등산로도 없는 능선 초입에 들어선다. 숲을 헤쳐 오른 지 두어 시간째. 땀이 눈 앞을 가리고, 숨이 가빠온다. 이제 고지다. 참호가 긴 세월 동안 나무뿌리와 풀 속에 잠들어 있다가 그의 눈에 띈다. 65년 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곳, 백골이 된 용사가 묻혀 있는 자리다.

이용석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조사과장(55)은 이렇게 지난 13년간 초야에 묻힌 6·25 참전용사의 유해를 찾는 호국선양(護國宣揚)사업의 최선봉에서 달려왔다. 산과 들을 누비면서 로션도 제대로 바르지 않는다는 그의 얼굴은 검게 탔다. 그는 “호국용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6월이면 밀물처럼 왔다가 금세 썰물처럼 빠져나간다”고 했다.

이 과장은 “유해발굴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사업”이라며 “저승에 가더라도 사자(使者)에게 용사 시신 한 구라도 더 찾고 오겠다고 말하겠다”고 했다. 그는 또 “시간과의 전쟁에서 기필코 이길 것”이라며 “65년째 산야에서 삭아가는 호국용사의 유해를 한 구라도 더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고 다짐했다.

이 과장은 육군본부가 2000년 6·25전쟁 50주년을 맞아 유해발굴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2007년 유해발굴감식단 정식 창설을 거쳐 지금까지 함께한 산증인이다. 그는 제보 청취와 현장답사를 통해 발굴지를 선정하는 조사과를 이끌고 있다.

“장의사가 아니오” 거절당하기도

육군 중령(3사 16기)이던 1999년 전방 대대장을 지내고 육군본부로 발령난 그에게 유해발굴 임무를 맡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인력도 없었다. 갑갑했다. 세 가지가 문제였다. ‘어디를 파야 하나….’ 전쟁사를 아무리 뒤져도 장병들의 전사 위치는 쓰여 있지 않았다. ‘어떻게 파야 하나….’ 발굴 관련 인류학·고고학적 지침이 없었다. ‘발굴 뒤엔 어떻게 해야 할지….’ 발굴된 전사자를 모실 방법도 제대로 몰랐다.

용어를 정하는 것부터 고심했다. 호국용사의 신체가 ‘시체’ 혹은 ‘해골’로 불려지고 있었다. 국어학자를 만나 ‘유해(遺骸)’의 개념부터 세웠다. 발굴 방법을 문의하러 유명 고고학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허탈하게도 ‘여긴 장의사 아니오’라는 냉랭한 대답이 돌아왔다. 수소문 끝에 미국 버클리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박선주 충북대 교수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장의사에게 염습 방법을 배웠다. 발굴을 시작한다는 ‘개토식(開土式·땅을 연다)’이란 용어도 만들었다.

최초 발굴 장소를 정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낙동강 방어선이던 경북 칠곡의 다부동전투 참전용사인 황대영 옹과 마주쳤다. 황옹을 비롯한 다부동전투 용사 일행에게 조언을 구하자 “1950년 8월 15차례나 적군과 격전을 벌인 다부동 328고지로 가보라”고 했다. 보고를 들은 상관은 “유해가 나오지 않으면 책임지겠느냐”고 물었다. 모두 책임지겠다고 답하고, 방을 나왔다.

2000년 4월3일 328고지에서 첫삽을 떴다. 마침내 용사의 오른쪽 어깨뼈가 나왔다. 한참을 더 팠다. 5m 떨어진 곳에서 군화가 발견됐다. 안쪽에 발가락뼈가 있었다. 포탄에 맞아 신체가 찢어진 용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 제대로 추념(追念)할 겨를이 없었다. 첫 발굴에서 유해를 찾은 것에 대해 그는 “하늘이 도우셨는지…. 아마도 용사의 혼백이 직접 안내해주신 게 아닐까”라고 했다.

세계 최고의 DNA 감식기술 갖기까지

[人사이드 人터뷰] "6·25 전사자 유해발굴은 시간과의 전쟁…반드시 이길 것"
이어 인근 369고지에서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된 고 최승갑 일병의 유해가 나왔다. ‘崔承甲’이라고 새겨진 삼각자와 호루라기 등 유품을 근거로 유족을 찾았다. 고인의 딸과 부인을 발굴 현장에 모셨다. 호루라기를 보는 순간 부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6·25 발발 1주일 전에 고인이 휴가를 나왔는데, 유품을 목에 걸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50년 만의 해후(邂逅)였습니다. ‘산천초목이 운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애초 유해를 발굴하면 화장 후 현충원 내 무명용사의 탑에 안치하기로 돼 있었다. 최 일병 부부, 부녀지간의 만남 뒤 군은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해 유해발굴에 DNA 감식 방법을 도입했다. 유해발굴감식단 내 중앙감식소는 미국 실종자확인사령부(JPAC) 감식소와 함께 인골 데이터베이스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신원확인 사업을 본격 추진하면서 한국이 DNA 감식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갖추게 된 것도 ‘용사님들의 덕택’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유해발굴 총괄과장 직책으로 전국을 누비는 동안 3년 기한으로 추진한 사업이 끝났다. 용사를 뵐수록 유해발굴을 영구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백선엽 장군 등 국방부 자문단 앞에서 그는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용사들의 백골 사진을 펴놓고 말했다. “이렇게 죽어간 용사가 기다리고 있는데, 제복을 입은 자가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설명회는 울음바다가 됐다. 상이군경회장은 그에게 “당신이 진정한 용사”라고 말했다.

“꿈속에서도 용사가 나를 부른다”

이 과장은 2003년 일선 포병 연대장으로 나갔다가 2005년 다시 조사과장으로 돌아왔다. 2007년 1월 국방부 직할로 유해발굴감식단이 정식 편성됐다. 그는 2010년 중령 예편 후 공무원 신분으로 다시 부대에 합류했다.

주 임무는 발굴 장소를 특정하는 것이다. 6·25 때 젊은이였던 노인들을 만나 당시 기억을 끄집어낸 뒤 산에 올라 개인참호와 교통로를 찾는 게 그의 일이다. 참호를 찾아낼 수 있는 안력(眼力)도 생겼다. 한 번 파낸 적이 있는 땅은 다져진 정도가 다르다고 그는 설명했다. “용사가 꿈에 나타나서 ‘용석아 와라, 와라’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계획한 기동로를 바꿔 산에 올랐는데, 호(참호) 수백개를 한꺼번에 찾았습니다.” 그는 ‘귀신 들린 놈’이란 소리가 싫지 않다고 했다.

이 과장의 책상에는 한반도가 지역별로 나뉜 소축척 지도책이 펼쳐져 있다. 주요 기동로와 호의 위치, 발굴 현장을 기록한 사인펜 표시로 빼곡한 지도책은 매우 낡았다.

지도를 펼쳐 보이던 그는 “6·25전쟁 당시 한반도 전역은 혼란스러운 전쟁터였다”고 했다. 지난달 28일엔 한 경찰용사 유해의 신원을 밝혀내 전남 영광 삼한리에 살고 있는 막내 동생에게 신원확인 통보서를 전하고 왔다. 68세가 된 동생은 어릴 적 어머니 등에 업혀 공비와 경찰 간의 전투가 벌어진 전라도 곳곳으로 형을 찾으러 다녔다고 했다. 60년 만에 형을 찾은 동생은 마을잔치를 벌였다. 이 과장은 “동생은 ‘저승에 가더라도 부모님께 형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게 돼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고 전했다.

유해발굴은 국가가 믿음을 주는 일

이 과장은 유해발굴이 ‘슬픔이 아닌 희망을 찾는 일’이자 내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했다. 이제까지 9000여구의 용사를 찾았고, 그중 100여 유해를 가족 품으로 돌려보냈지만, 유해 한 구라도 더 찾기를 갈망하고 있다. “철모 속에 들어 있는 유골이나, 유해 사이를 뚫고 머리카락처럼 자란 나무뿌리를 보면서 ‘나는 누구냐’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다시 전쟁이 난다면 내 아들과 내 손자가 아니라 바로 내가 죽게 되는 것이죠.” 그는 유해발굴 사업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에게 국가가 기꺼이 해야 하는 일, 젊은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믿음을 주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초야에 묻힌 용사들의 유해가 유실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국토가 개발되고 강물이 범람하는 동안 백골이 점점 바스러져 더욱 찾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현재까지 2700건의 제보를 받았지만, 13만구의 국군 유해를 모두 찾기엔 너무나 부족하다. DNA 시료 채취에 동참한 유족도 3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누구나 8촌 이내에 전사자가 한 분씩은 있지 않나. 가까운 보건소나 군부대에서 DNA 시료 채취에 동참해 달라”고 당부했다. 1980년대 방송사 주도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했던 것처럼, 전 국민이 동참하는 유해찾기 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이 과장은 “유해발굴감식단에는 준비된 최고의 인력들이 있다”며 “언젠가는 비무장지대(DMZ), 북한 지역에서도 용사들을 찾게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 유해 8476구 발굴…107구만 유가족 품에
전사자 유해 묻힌 곳 제보·DNA 시료채취 참여해주세요


유해발굴감식단은 국방부가 호국보훈사업 일환으로 벌이는 전사자 유해발굴을 주도하는 조직이다. 주 임무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호국용사의 유해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국립현충원에 모시는 일이다. 이 사업은 당초 6·25전쟁 50주년을 맞은 2000년 육군이 전쟁 당시 경북 칠곡에서 벌어진 다부동전투 전사자의 유해 발굴을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2007년 국방부 산하에 유해발굴감식단이 정식 창설됐다. 기관 구호는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다. 발굴과와 조사과, 감식과 등 5개 과와 전사자의 예식을 담당하는 영현소대로 이뤄져 있다. 지금까지 유해발굴감식단이 찾은 6·25 국군 전사자 유해는 8476여구다. 이 중 107분의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 품에 돌려보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뀐 고지전이 벌어진 6·25전쟁에서 대부분 용사는 능선 주변의 전투호 인근에 묻혔다. 이용석 과장은 “도섭(다리를 건너지 않고 하천을 건너는) 지역에 묻힌 용사는 찾기조차 힘든 실정”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한 국군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DNA 시료 채취사업을 벌이고 있다. 참전용사와 지역 주민들의 매몰 지역에 대한 제보도 절실하다. 홈페이지는 http://www.withcountry.mil.kr, 전화번호는 1577-5625(오!육이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