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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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이 판치는 시대다. 미국의 사례를 보자. 2006년 한 여론조사에서 뉴욕 시민의 36%가 “미국 연방 공무원이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 공격에 가담했거나 공격을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했다. 2013년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의 37%가 “기후 변화는 거짓말”이라고 믿었고, 21%는 “미국 정부가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감추고 있다”고 응답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다양한 음모론과 조작설이 제기된다. 근거 없는 풍설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찌라시 공화국’이란 말이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전혀 근거도 없는 음모론을 믿을까. 왜 허위 정보가 널리 유포되고, 때로는 폭력 사태로까지 번질까.

[책마을] 음모보다 진실이 의심받는 시대…무엇을 들을 것인가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사진)는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에서 음모론을 주제로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온갖 종류의 수많은 허위 정보가 떠도는 현실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보가 전파되고 입소문을 타게 되는 방식을 살펴본다. 2009~2012년 오바마 행정부에서 규제정보국 국장으로 활동한 선스타인 교수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법학자로 헌법학과 법철학 분야에서 독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베스트셀러 《넛지》《심플러》루머 등의 저자로 행동경제학에도 정통하다.

그는 음모론이 만연하는 이유를 자신의 생각과 다른 관점이나 정보는 배제하고 일치하는 내용만 받아들여 기존 입장을 강화하는 성향인 ‘절름발이 인식’에서 찾는다. 이어 정보와 평판의 폭포효과, 집단 극단화 등의 개념으로 음모론이 확산되는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일각에선 음모론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음모론을 믿는 사람은 전체 인구 중 아주 낮은 비율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음모론은 행동이나 대가가 따르지 않고 때때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의사 신념에 그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때로는 음모론이 폭력을 부추기는 데 일조하고, 특정 음모론 신봉자 중 극히 일부만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도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의 연방 정부 청사에 폭탄을 터뜨려 168명을 죽게 한 테러범들은 연방 정부에 대한 일련의 음모론적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저자는 정부의 음모론에 대한 대응책으로 ‘인지적 침투’를 제시한다. 정부 요원이나 협조자들이 공개적으로 또는 익명으로 해외 채팅룸,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 심지어 현실 공간의 집단 속으로 파고들어 음모론자들의 사실에 입각한 전제, 인과 논리, 정치적 행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음모론이 약화되도록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마을] 음모보다 진실이 의심받는 시대…무엇을 들을 것인가
이런 주장은 미국 사회에 큰 논란을 몰고 왔다. ‘파시즘의 귀환’ ‘외국 집단뿐 아니라 미국 내 정부 반대 세력에 침투하려는 계획’이란 비난이 일었다. 미국의 대표적 보수 논객인 글렌 백은 선스타인 교수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인지적 침투의 개념이 반정부적인 미국인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인식은 잘못”이라며 “논의의 초점은 미국 이외 국가들의 음모론에서 비롯되는 심각한 안보 위험, 특히 테러 위험 등에 맞춰져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음모론에 이어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을 권리, 규제의 비용·편익 분석, 기후 변화, 결혼권, 동물권, 신진보주의 등 미국에서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안을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비용·편익 분석이 사소한 위험은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심각한 위험은 등한시할 때 발생하는 ‘잘못된 두려움’이라는 보편적인 문제의 해법으로서 가장 큰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자유방임주의의 미흡함을 경계하는 동시에 계획경제의 폐단을 예리하게 직시하는 신진보주의를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가장 알맞은 정책 기조로 옹호한다.

저자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고 합의할 수 없을 듯 보이는 심각한 갈등과 논쟁적인 사안 속에서 함께 대화하고 살아가고 통치하는 해법으로 ‘최소주의’와 ‘중간주의’를 제시한다. 최소주의자는 의견의 불일치가 심한 거창하고 이론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당면한 특정 사안만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중간주의자는 모든 관계자의 정당한 주장을 경청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양 극단의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저자는 “최소주의와 중간주의 모두 현실적 약점과 이론적 단점이 있지만, 양극화된 신념과 믿음이 대립하는 현실 속에서 지극히 유용하고 바람직한 해법”이라고 설명한다.

각각의 주제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음모가 정당화되고 진실이 의심받는 시대에 무엇을 말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통찰력과 깊이 있는 사고를 보여준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