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욕구 못읽어 외면당한 'Z10'…블랙베리, 재기 꿈꾸며 야심작 내놨는데
2012년 5월 미국 올랜도에서 열린 ‘블랙베리월드 2012’ 현장에 있었다. IT모바일부에서 휴대폰 분야를 맡고 있던 때다. 행사는 캐나다 휴대폰업체 RIM(리서치 인 모션, 현재는 블랙베리로 사명 변경)이 매년 여는 개발자 콘퍼런스였다. 토르스텐 하인스 최고경영자(CEO)는 기조연설에서 “최신 운영체제(OS) ‘블랙베리 10’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 어디서도 사람들을 연결해 줄 수 있다는 점”이라고 소개했다.

정작 참석자들의 관심은 함께 발표한 스마트폰 ‘블랙베리 10 개발자 모델(Dev Alpha)’에 쏠렸다. 개발자들이 ‘블랙베리 10’ OS에 알맞은 애플리케이션(앱)을 미리 만들 수 있도록 RIM이 제공한 이 스마트폰에는 블랙베리 스마트폰의 상징과도 같았던 ‘물리 쿼티’ 키패드를 빼고 4.2인치 디스플레이를 장착했다.

‘Z10’
‘Z10’
하지만 대다수 참석자는 “블랙베리의 매력인 쿼티 키패드를 삭제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현장을 취재하던 전 세계 기자들도 ‘자존심 버린 블랙베리’와 같은 제목의 기사를 각국에 타전했다. RIM은 지난해 1월 회사 이름을 블랙베리로 바꾸고 블랙베리 10을 탑재한 터치스크린 모델 ‘Z10’을 내놨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쿼티 키보드를 장착한 ‘Q10’도 함께 선보였지만 ‘대세’를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창업자의 잇단 판단 실패가 몰락 초래

불과 6~7년 전만 해도 블랙베리의 위세는 등등했다. 2000년대 초반 시장에 등장해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기 전까지 북미 스마트폰 시장의 점유율이 50% 이상이었다. 쿼티 키패드 덕분에 이메일 등 업무 처리를 쉽게 할 수 있고 막강한 보안 기능을 갖춰 기업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의원 시절부터 블랙베리를 애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블랙베리의 몰락은 공동 창업자이자 CEO였던 짐 발실리와 마이크 라자리디스의 잇단 판단 실패 때문이었다. 기업 시장을 장악한 것에 만족해 일반 소비자 시장 대응에 늦었고, 아이폰의 등장을 과소평가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OS를 내장한 제품들이 높은 확장성을 무기로 시장 점유율을 높여나갔지만 이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태블릿PC가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자 2011년 부랴부랴 ‘플레이북’을 내놨지만 말 그대로 ‘쫄딱’ 망했다.

2012년 1월 결국 두 창업자는 물러나고 토르스텐 하인스가 새 CEO 자리에 올랐다. 블랙베리 10과 Z10, Q10 등은 침몰하는 배를 끌어올리려는 몸부림이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블랙베리의 점유율은 1%를 넘지 못했다. 삼성전자는 23.7%, 애플은 11.7%였다.

○‘블랙베리 클래식’…과연 부활할까

美 뉴욕서 선보인 ‘블랙베리 클래식’
美 뉴욕서 선보인 ‘블랙베리 클래식’
스마트폰 시장만큼 기업의 성장과 쇠락이 빠른 곳도 없을 것이다. 2012년 3분기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과 올해 3분기를 비교해보면 삼성전자와 애플만이 변함없이 1,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2년에는 블랙베리(당시 RIM)와 ZTE, HTC가 3~5위였고 올해는 샤오미, 레노버, LG전자가 같은 자리를 차지했다. 다시 시계를 3년 전으로 되돌려 2009년 점유율을 보면 지금은 사라진 ‘거대 공룡’ 노키아가 38.3%로 1위였다. 블랙베리는 19.9%로 2위, 삼성전자는 3.0%에 불과했다.

2008년 ‘옴니아’ 시리즈로 비웃음을 샀던 삼성전자는 2011년 ‘갤럭시 S2’의 성공을 발판 삼아 불과 3년 만에 세계 최대 스마트폰 업체로 성장했다. 지금은 샤오미의 추격을 뿌리쳐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도 순식간에 블랙베리나 노키아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으니 긴장을 늦출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7일(현지시간) 블랙베리는 새 제품 ‘블랙베리 클래식’을 내놨다. 3.5인치 터치스크린과 쿼티 키보드를 내장하는 등 과거 인기를 끌었던 ‘볼드’ 시리즈의 외관과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2012년에 등장한 프로세서(퀄컴 스냅드래곤 S4 MSM8960 듀얼코어)를 내장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부분도 보인다. 블랙베리가 과연 부활할 수 있을까.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