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락하는 국제유가…꿈틀대는 음모론
국제유가가 6개월여 만에 50%가량 폭락하면서 음모론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상당수 에너지 전문가는 공급과잉을 가격 하락의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지만 미국 워싱턴 정가에선 유가 하락 속도와 지정학적 파장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에서 시장이 아닌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확대 재생산되는 음모론

음모론은 지난 10월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가 제기한 이후 증폭되고 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적대 국가’인 러시아와 이란, 시리아를 압박하기 위해 와일드 카드를 꺼냈다는 게 핵심이다. 미국은 셰일오일(땅속 진흙 퇴적암층(셰일·shale)에서 뽑아낸 원유)을 바탕으로, 사우디는 ‘감산 거부’를 통해 공급과잉을 지속시켜 유가 하락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의 태도 변화가 이런 음모론에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종주국인 사우디는 과거 유가가 급등락할 때마다 생산량을 조절해 가격을 안정시키는 ‘스윙 프로듀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알리 알 나이미 사우디 석유장관은 “가격은 시장 논리에 따라 오르고 내리기 마련”이라며 감산 계획이 없음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럴 때마다 유가는 배럴당 80달러에서 70달러, 60달러대로 떨어졌다.

최대 피해자는 원유수출국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과 신냉전 관계에 들어간 러시 아, 핵 프로그램을 고집하고 있는 이란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은 재정수입의 절반 이상을 원유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재정수지 균형을 맞추려면 유가가 배럴당 각각 100달러와 130달러를 넘어야 한다. 이슬람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는 적대관계에 있는 이란과 시리아(시아파)의 돈줄을 차단할 수도 있다.

미국과 사우디는 최근까지 껄끄러운 사이였다. 사우디는 이란과 핵협상을 벌이고, 시리아 내전에 군사개입을 하지 않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나타내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올해 3월 사우디를 방문해 관계 회복을 시도했고, 미국의 ‘이슬람국가(IS)’ 격퇴 작전에 사우디가 참여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회복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폭락하는 국제유가…꿈틀대는 음모론
○사우디와 미 셰일업체의 경쟁

국제유가 하락을 사우디와 미국의 원유시장 주도권 다툼의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영국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아랍 왕족(Sheikhs)과 셰일의 대결이 국제유가를 추락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우디가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감산을 하지 않는 것은 에너지시장의 헤게모니를 위협하고 있는 미국 셰일업체에 타격을 주기 위한 일종의 ‘흔들기(shake-out)’ 전략이란 얘기다.

미국의 셰일오일은 유가가 낮을 때는 채산성이 낮아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최근 4년여 동안 유가가 배럴당 110달러 수준으로 높게 유지되면서 생산량이 급증했다. 2010년 이후 미국에서 시추된 유정은 2만개다. 사우디의 10배가 넘었다.

미국 원유 생산량은 2011년 하루 500만배럴에서 최근 900만배럴로 늘어났다. 여기에 초경질유와 천연가스액(NGL)을 합치면 하루 생산량은 1200만배럴에 육박해 사우디와 거의 맞먹는다. 셰일업체의 채산성이 악화돼 신규 유정을 뚫지 않을 때까지 사우디의 ‘가격 압박’이 지속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3대 셰일유전 지대인 노스다코타주의 바켄, 텍사스주의 이글포드와 페르미안 지역에서 새로운 유정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손익분기 유가는 배럴당 50달러대 후반에서 70달러대 중반인 것으로 분석했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