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일본 히가시오사카시 출생 △1958년 일본 규슈 아키타공고 졸업 △1989년 장애인의 날 국무총리표창 △1994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2001년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 △2007년 조선대 명예미술학박사 △2012년 대한민국 정부 보관문화훈장 △2012년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1939년 일본 히가시오사카시 출생 △1958년 일본 규슈 아키타공고 졸업 △1989년 장애인의 날 국무총리표창 △1994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2001년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 △2007년 조선대 명예미술학박사 △2012년 대한민국 정부 보관문화훈장 △2012년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늘 일이 있다는 건 행복한 겁니다.” 평생을 수집해온 미술품 기증을 통해 메세나 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재일 동포 하정웅 씨(76).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일복이 터진 사람이다.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 기금운용 규모로 국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그리고 일본 내 부동산 임대업체 가와모토 회장, 재일한국인문화예술협회 고문 등 가진 직함도 적지 않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억울하게 희생된 강제 징용자를 찾아내 위령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또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파해 아스카문화를 태동시킨 왕인 박사 현창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특히 광주 시각장애인에겐 ‘맹인들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30여년간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최근엔 자전 에세이도 냈다. ‘날마다 한 걸음’이라는 제목에 ‘미술 컬렉터 하정웅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 그는 자신의 삶과 철학을 오롯이 담아냈다.

[人사이드 人터뷰] "在日동포 설움, 그림서 위로받아…수천억대 소장품 기증"
그가 지금까지 기증해온 미술품은 1만여점을 헤아린다. 이 땅에 미술품 기증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93년 광주시립미술관을 시작으로 부산 대전 포항 전주 영암 등지의 공공미술관과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 조선대와 숙명여대 박물관 등 그가 작품을 기증한 곳은 모두 9군데에 이른다. 일본에도 가쿠노다테 히라스쿠기념미술관, 센보쿠시립 다자와도서관 등 3곳에 그의 기증 작품이 전시돼 있다. 작품들은 시가로 따지면 수천억원대에 이른다. 하루에 한 점씩 모아도 27년이 걸리는 방대한 규모다. 25세 때부터 수집에 나서 50년 이상을 모아온 그의 컬렉션은 그에겐 영혼이자 분신이었다. 재일 작가부터 한국 작가와 일본 작가 그리고 피카소 샤걀 뭉크 워홀 달리 등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이 망라돼 있다.

그가 애지중지하던 작품을 아낌없이 기증해온 이유는 뭘까. “가난과 차별, 불신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자이니치(在日·재일 동포를 이르는 말)’ 시절을 극복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일으켜준 매개체가 미술 작품이었습니다. 내가 작품을 통해 구원받았듯 다른 사람들도 기쁨과 위안, 평화와 행복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는 “그림을 보면서 기도와 나눔, 공유의 의미를 깨우쳤고 이를 실천에 옮겼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공유 작업’으로 자칫 묻힐 뻔한 많은 미술작가들이 재평가받기도 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로 백남준에 이어 한국인 두 번째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 재일 작가 이우환도 그중 한 명이다. 1970년대 이후 일본 모노파를 이끈 그의 그림은 국제 경매시장에서 26억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그를 컬렉터의 길로 이끈 전화황을 비롯 송영옥 조양규 손아유 곽인식 곽덕준, 요절한 문승근에 이르기까지 숱한 재일 동포 작가가 그를 통해 다시 조명됐다.

[人사이드 人터뷰] "在日동포 설움, 그림서 위로받아…수천억대 소장품 기증"
“재일 동포 작가들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재일 동포들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낀 ‘주변인’인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그들의 작품엔 눈과 마음을 이끄는 강렬함이 있었어요. 저를 포함한 재일 한국인의 삶과 역사가 투영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작품은 시대의 증언이자 기록이며 역사적 자료인 셈이죠.”

그는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다. 그림도 그래서 사 모을 수 있었다. 규슈 아키타현에서 성장할 때는 여느 동포들처럼 가난과 차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학업 성적이 늘 1, 2등을 다퉜고 고교 때 공모전에 당선되는 등 그림에 누구보다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고 한국인이란 이유로 교사의 길을 포기해야 했다. 고교 졸업 때는 졸업생 중 유일하게 취업을 하지 못했다.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도쿄 근처 가와구치에서는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끝에 영양실조로 실명 위기까지 겪어야 했다. 인생역전의 기회는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 찾아왔다. 결혼 직후인 24세 때 사기를 당했다. TV 세탁기 등 혼수품을 샀던 전자제품 대리점 사장이 그의 도장을 빌려 마음대로 외상거래를 했던 것이다. 사장이 그의 앞으로 수백만엔대 빚을 남긴 채 자취를 감췄을 때 울며 겨자 먹기로 대리점 사장을 맡았다. 사업은 갑자기 대박이 났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컬러TV 등 전자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면서 돈방석에 앉게 됐다. 월 최고 6000만엔의 매출을 올려 3개월 만에 빚도 모두 갚았다.

1970년 초반에는 부동산 임대업에도 손을 댔다. 도쿄를 중심으로 땅을 사들이고 건물을 지었는데 이번엔 다나카 총리의 일본열도개조계획과 맞물려 땅값이 급등하고 개발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그는 “자루로 쓸어담은 돈을 다 셀 수 없어 이불 밑에 깔고 잘 정도로 원 없이 돈을 벌었다”며 “어머님이 물려주신 정직과 신뢰라는 유산이 사업 성공의 가장 큰 비결이 됐다”고 밝혔다.

일본의 명문 아키타공업고를 졸업한 뒤 그는 가난과 굶주림, 차별이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북송선을 타려 했다. “북한은 숙식 해결은 물론 병도 고칠 수 있는 낙원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대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동포들의 권익 신장에 힘써달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협동조합을 만들고 동포들의 세금과 생활민원 상담 등을 하며 4년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러나 결혼 후 사기를 당해 가족의 생계가 발등의 불이 됐다. 조총련에 자신의 처지를 말한 뒤 잠시 쉬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장 돌아온 건 싸늘하게 바뀐 그들의 눈초리였다. “화장실에서 ‘저 놈이 스파이 같다. 출입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등의 온갖 악담이 들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열성을 다했다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그길로 집에 와 제가 받았던 김일성훈장을 쓰레기통에 처박았습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의 섭섭한 사연도 꺼냈다. 가와구치민단 부단장을 맡던 40대 시절이었다. 어머니 환갑잔치에 알고 지내던 조총련 쪽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이날 이후 ‘빨갱이’라는 소문이 났다. “곧바로 사임 권유서가 날아왔죠. 일본에서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건 일본인들의 차별보다도 동포끼리 남북으로 갈려 서로를 헐뜯고 상처냈던 일입니다.”

그는 당초 수집 미술품으로 일본에 미술관을 건립하려 했다. 1980년대 초 그가 조선인 징용 희생자들을 찾아내 왜곡된 역사를 바로세웠던 아키다 센보쿠시에 미술관 건립을 추진했다. 미술관 이름은 ‘기도의 미술관’. 그러나 당시 정신대, 징용 희생자 보상 문제가 한·일 간 외교 쟁점이 되면서 협조를 약속했던 센보쿠시가 태도를 바꿨고 사업엔 제동이 걸렸다. 수장고에서 잠자던 작품들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1993년 광주시립미술관에 212점이 기증되면서부터다. 개관 2년째를 맞도록 변변한 전시 작품이 없던 광주시립미술관 측에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기증을 흔쾌히 결정한 것은 당시 시장이 ‘광주를 도와주고 키워주고 사랑해달라’고 한 호소도 있었지만 그의 남다른 ‘뿌리의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처음 고국을 찾은 때는 1973년이다. “아버님이 어느날 입 밖에 꺼내지 않던 고향 영암에 가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서 부모님을 모시고 영암에 갔는데 난생 처음 간 곳인데도 그렇게 포근하고 편안할 수가 없었어요. 고향이 이런 곳인가보다 생각했죠. 아버님은 그 이듬해 돌아가셨어요. 고맙고 미안하단 말을 남기고….” 부모님 얘기를 하면서 그의 눈은 어느새 붉어졌다.

“한국에서만이라도 재일 동포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는 선의를 베풀 때마다 돌아오는 비딱한 시선에 상처를 입은 적이 많다고 했다. “국내에 기증한 작품을 쓰레기로 비하하거나 시각장애인들을 도우려던 선의를 개인의 영달에 이용했다는 등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도 그는 요즘 행복하다고 했다. 할 일이 있고 선의로 하는 그 일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영암 하정웅미술관에 학예사 관장이 없어요. 미술관 틀을 만드는 것도 제 과제이고 광주시가 하정웅미술관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는 것도 제 일입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 저의 미학적 관점과 가치관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특별한 감나무 식수 원폭폐허서 살아남은 감나무
생명의 존엄성 알리려 식수 13년 만에 결실 맺어


[人사이드 人터뷰] "在日동포 설움, 그림서 위로받아…수천억대 소장품 기증"
광주시립미술관 옆 중외공원 숲속 구석진 곳에 키작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15㎝ 둘레의 갸날픈 몸매에 높고 치렁치렁한 줄기를 이고 있는 이 감나무는 일본에서 건너왔다. 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나가사키에서 살아남은 피폭 감나무의 2세다. 이 나무에 지난달 빨간 감 하나가 열렸다. 2002년 나무가 심어진 지 13년 만이다. 감나무는 당초 2000년 광주비엔날레 때 일본 작가 미야지마 다츠오의 ‘시간의 소생’이란 이름으로 처음 심어졌다. 당시 작가의 명예홍보위원이던 하정웅 씨가 심었으나 두 차례의 고사와 재식수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처음 심은 나무는 2000년 5월 반일 감정을 가진 사람에 의해 훼손돼 고사했다. 2001년 2차로 심은 나무도 보호 안전망까지 설치했지만 2008년 7월 독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 누군가에 의해 원줄기가 훼손돼 고사했다.

이번에 열매를 맺은 감나무는 2002년 중외공원 내 비밀장소에 심어 하씨와 광주시립미술관 직원들의 손길 속에 자라왔다. 하씨는 “피폭 감나무는 원폭피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명체로 핵무기와 전쟁의 위험성을 고발하고 자연과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고 있다”며 “이 감나무를 통해 우리는 평화와 행복 인류의 상생을 되새겨보게 된다”고 말했다.

광주=최성국 기자 sk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