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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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르헨티나는 다시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벌써 여덟 번째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번 디폴트 위기는 과거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지만, 아르헨티나가 세계 자본시장의 말썽꾸러기로 전락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먹튀하려 하지 마. 아르헨티나(Don’t try to flee, Argentina)’라고 비꼬았다. 이는 물론 페로니즘을 만들어낸 페론 대통령(사진)의 부인 에바 페론의 실화를 담은 뮤지컬 ‘에비타’의 노래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빗댄 말이다. 예견된 사태여서 세계자본시장과 각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별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향후 아르헨티나는 정부든 민간이든 국제금융시장으로부터 차입하거나 투자를 받기 어려워졌다. 올초 이코노미스트지는 ‘100년간의 추락’이란 제목으로 아르헨티나의 비극을 다룬 바 있다.

페론이 남긴 포퓰리즘·폐쇄경제…아르헨, 10대 富國서 골칫덩이로
사실 경제학자들에게 아르헨티나는 이해하기 힘든 도전이다.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인 사이먼 쿠즈네츠는 이 세상의 나라들을 선진국, 후진국, 일본 그리고 아르헨티나로 분류했다. 다른 나라는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를 모방했지만 아르헨티나는 유형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큰 전쟁이나 사회주의 혁명과 같은 격변을 겪은 것도 아니지만 100년 동안 추락을 거듭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불황, 1989~1990년 하이퍼인플레이션, 2001년 경제위기를 겪었다. 최근에는 채권자인 파리클럽과 협상 중이라고 하지만 다시 디폴트에 따른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무렵, 아르헨티나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보다 더 부유한 세계 10대 부국에 속했으며 유럽 이민자들을 흡인하는 자석이었다. 소설 ‘엄마 찾아 삼만리’는 가난한 나라 이탈리아 제노바에 사는 마르코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자나라인 아르헨티나로 일하러 간 엄마를 찾아가는 모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제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도 칠레나 우루과이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더 낮으며, 세계 자본시장으로부터 골치 아픈 신흥국으로 치부되고 있다. 왜 이렇게 아르헨티나는 100년 사이에 가장 이민 가고 싶은 나라에서 조롱거리로 추락하고 말았는가?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경험을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제도적 전근대성과 무역정책, 제도적 불비 등이 그 요인으로 제시된다. 먼저 제도적 전근대성이다. 1차대전 이후 아르헨티나는 1930년부터 시작해 1943년, 1955년, 1962년, 1966년, 1976년에 일련의 군사 쿠데타를 겪었다. 이제 군사독재가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 민주주의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페론이 남긴 포퓰리즘의 유산도 지속되고 있다. 정치적 불확실성은 경제활동을 위축시킨다. 특히 정치권력이 인플레이션이나 재분배 정책을 실행해 페소화의 화폐적 가치나 여타 사적 재산권을 침해하게 되면 이런 위축효과는 더 확대된다.

1990년대에 아르헨티나는 민영화를 비롯한 소위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물가 인플레이션을 가져온 외환·환율정책 등 반(反)시장적이고 반(反)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쳐 실패했다. 이는 유권자들에게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나쁜 오해를 심어줬고 후일 유권자들이 경쟁을 촉진하는 자유화 조치들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대런 애쓰모글루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제도의 포용성 및 착취성’이란 관점에서 아르헨티나의 추락을 설명한다. 아르헨티나는 1914년까지 50년간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지만 이는 주로 소수 엘리트의 지배를 받는 수출농업경제의 성장에 따른 것이기에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수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의 필리페 캄판테도 제조업의 기반으로서 훌륭한 교육시스템이 없었기에 아르헨티나에서는 경쟁력 높은 제조업들이 성장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페론이 남긴 포퓰리즘·폐쇄경제…아르헨, 10대 富國서 골칫덩이로
아르헨티나에서 결국 군사독재가 끝나고 선거가 치러졌지만 1940년대 페론의 등장 이후 페론당이 정권을 독점해왔다. 페론당은 노동운동을 정치 기반으로 삼고, 유권자를 매수하고 정부계약과 공무원직을 대가로 정치적 지지를 얻는 방식으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들이 펼친 경제정책과 제도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고 한다. 페론당 추종자들의 배를 불려줌으로써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공고하게 만들고자 했다.

다음으로 아르헨티나의 추락을 설명하는 것으로 무역정책이 있다. 아르헨티나는 무역정책에서 나머지 국가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국내 저축이 아니라 해외 자본이 아르헨티나에 투자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 결과 1차 세계대전이라는 충격이 가해지자 투자된 자본이 빠져나갔고 전후에도 그 수준은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후 다시 세계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고 각국이 자국 산업 보호로 정책을 바꿔나가자 이 역시 아르헨티나에 나쁜 쪽으로 큰 충격을 줬다. 농업 수출 주도 성장의 대표적 모델이던 아르헨티나는 다른 나라에 비해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선진국들은 전후 자유무역으로 회귀하기 위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를 협의하는 중이었지만 페론 치하의 아르헨티나는 새로운 개방경제의 시기가 열리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수입대체에 적극 나서면서 폐쇄경제 방향으로 치우치고 말았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는 산업, 특히 농업의 생산과 수출에 무수한 규제가 가해지고 있다. 가끔 자유화 조치가 시도되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돌파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카를로스 사울 메넴 대통령의 ‘가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실망스러운 기억이 워낙 강한 데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농산물 생산과 수출에 이해가 걸린 인구의 3분의 1은 규제개혁에 찬성한다. 그러나 국내 산업에 취업하고 있는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은 규제의 존속을 바란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셰일오일과 가스전을 보유하고 있다. 올바른 경제이론에 입각한 정책을 펼칠 수 있게만 된다면 아르헨티나의 부흥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전제를 충족시키는 정치적 환경이 어떻게 마련될 수 있는지는 풀기 어려운 숙제다. 추락하는 것에는 어쩌면 날개가 없는지 모른다. 아르헨티나는 중진국 함정에 빠진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반면교사(反面敎師)다.

■ 100년간의 추락 이유
이해관계 조율 기구 없고, 사유 재산권 보호 안되고, 통화정책 일관성 유지못해


아르헨티나의 추락은 ‘제도의 부재’ 때문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왜 비슷한 조건의 호주는 아르헨티나와 달리 견실한 성장을 하는가? 여기에는 호주 천연자원 가격이 아르헨티나 농산물 가격보다는 유리한 조건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운(運)도 작용했다. 그러나 핵심적 사실은 호주가 상충하는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는 제도를 만든 데 비해 아르헨티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1912년에 이미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호주의 독립적 관세위원회 같은 기구를 창설하지 못했다. 대통령들은 헌법과 사법부를 존중하지 않았다. 사법부 판사들을 멋대로 바꾸고 예산도 국회의 동의 없이 수정했다. 사적 재산권 보호도 불안정해서 국유화 조치가 언제 자행될지 알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통계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이런 제도의 부재를 비롯해 여타 요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남미 국가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왜 아르헨티나만 추락을 계속했나?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조지프 살레노의 통화정책적 혹은 화폐제도적 설명이 눈에 띈다.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사울 메넴 대통령이 1990년대에 민영화 등 자유화 조치를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달러화와 페소화의 교환비율을 고정시키려는 반(反)시장적인 무리한 정책을 편 게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경제를 파탄시키는 정책으로 통화에 대한 신뢰의 파괴만 한 것은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승인 아래 페소와 달러의 1 대 1 전환을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기에 해외 투자자들은 안심하고 아르헨티나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러나 부분지급준비제도 아래의 아르헨티나 은행들은 이 투자자금을 기초로 해 신용을 급격하게 팽창시켰다. 그 결과 페소화 시장가치는 하락했지만 중앙은행은 이 고정 비율을 무리하게 지키려고 했다. 결국 중앙은행에 의한 통제가격의 유지가 불가능해짐이 밝혀지자 경제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무너졌다. 1989년 7월부터 1년 사이 2000%가 넘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김이석 <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