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도 경영' 여성 CEO의 카리스마 패션
검은색, 남색, 짙은 회색 위주의 칙칙한 바지 정장. 몸의 굴곡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재킷. 좋게 말하면 중성적인 이미지의 ‘매니시 룩’, 솔직히 말하면 멋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볼품없는 스타일. 20세기 여성 최고경영자(CEO)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여성 지도자는 물론 여성 CEO가 드물었던 시절 여성성이 부각된 패션은 업무에 방해되는 옷차림으로 여겨졌다. 밋밋한 바지 정장은 남성과 대등한 업무 능력을 강조하고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고자 했던 여성 CEO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선택한 일종의 ‘전투복’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여성 CEO들은 선배들의 패션 공식을 거부한다. 그들에게 패션은 더 이상 여성성을 감추는 방어적 수단이 아니다. ‘옷차림도 전략이다’라는 한 의류 브랜드의 슬로건처럼 ‘T(time, 시간)·P(place, 장소)·O(occasion, 상황)에 맞춰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공식 석상에서는 기업 이미지에 걸맞은 옷차림을 추구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44)의 패션 키워드는 품격, 신뢰감, 안정감이다.

면세점까지 아우르는 호텔신라는 지난 1월 세계 3대 공항으로 꼽히는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면세점 화장품·향수 매장 운영권을 따냈다. 2010년 세계 최초로 루이비통을 인천공항점에 입점시킨 데 이은 쾌거다. 당시 명품계의 황제로 통하는 베르나르 아르너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그룹 회장 방한시 이 사장이 직접 공항까지 마중 나가는 등 공을 들인 결과였다.

LVMH그룹은 루이비통, 지방시, 겐조, 겔랑, 펜디 등을 보유한 세계 최대 명품 업체다. 명품과 직결되는 사업을 하고 있는 만큼 이 사장이 소위 ‘명품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인 셈이다. 장식을 최대한 배제한 무채색 치마 정장에 부드러운 이미지를 심어줄 만한 브로치 등으로 포인트를 줘 카리스마와 여성성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 사장의 스타일은 14일 호텔신라 정기 주주총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2012년부터 3년 연속 의장 역할을 맡은 자리인 데다 주총의 상징성, 중요성을 감안해 단아한 남색 치마 정장을 택했지만 상의 앞 부분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디자인을 골랐다.

이 사장의 동생인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사장도 패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여성 CEO 중 한 명이다. 지난 1월 삼성그룹 신년하례식에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붉은색 코트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지난해 신년하례식 때는 자신이 국내에 들여온 이탈리아 명품 편집매장 10꼬르소꼬모의 붉은색 코트를 선보였다.

이 제품은 웅가로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잠바티스타 발리의 제품으로 수백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0꼬르소꼬모에서 판매하는 블랙 리버백을 즐겨 들어 ‘이서현 백’으로 통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사장이 2년 연속 택한 붉은색은 부친인 이 회장이 신년하례식에서 언급한 ‘사업구조의 혁신’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패션 업계 관계자는 “상위 1%의 패션을 따라해 보고 싶다는 로망, 유명인에게 갖는 소비자의 신뢰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 사장이 입은 옷은 해당 브랜드 매출로 직결된다”고 귀띔했다.

해외 여성 CEO 중에서는 머리사 메이어 야후 CEO가 전략적인 패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메이어 CEO는 지난 1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뽑은 ‘올해 주목해야 할 7인의 CEO’에 선정된 유력 여성 경영인이다. 그는 같은 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가전전시회(CES)에서 보라색과 남색이 섞인 파격적인 원피스를 입은 채 기조연설자로 나서 혁신과 변화를 역설했다.

CEO로는 이례적으로 지난해 8월 유명 패션잡지인 보그에 여성적인 매력을 부각시키는 화보를 실어 통상적인 CEO 이미지와는 다른 길을 걷겠다고 예고했다. 반면 제너럴모터스(GM)를 구원할 잔 다르크로 떠오른 메리 바라 GM CEO는 자동차회사 최초의 여성 수장답게 보수적인 바지 정장을 고수한다.

간호섭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는 “재력이 있어 어떤 브랜드든 선택할 수 있는 이서현 사장이 자사 제품을 고집하는 것은 경영상 현명한 선택”이라며 “이처럼 여성 CEO들이 자신의 패션을 기업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판단하는 것이 효과를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선주/임현우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