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저스, 디자인부터 생산까지…전세계 車마니아  '온라인 협업', '세상에 없던' 군용차 만들다
2011년 미국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기획청(DARPA)은 이례적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차세대 전투차량의 시제품 디자인을 공모했다. 전통적으로 군용차를 설계하는 것은 DARPA의 업무였지만, 민간에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해 2월부터 한 달간 진행된 공모전에는 총 160개의 디자인 시안이 경합을 벌였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 건 ‘로컬모터스’라는 무명의 작은 회사였다. 2008년 설립한 로컬모터스는 기존의 대량생산 체제 위주의 자동차 회사들과 달리 취향이 다양한 구매자들의 구미에 맞는 맞춤형 자동차 생산업체다. 공동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존 로저스는 ‘XC2V’라는 전투차량 설계안을 출품해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전장에서 신속한 병력 수송과 부상자 구출에 사용되는 차세대 전투차량인 XC2V는 혁신적이고 탁월한 기능 설계로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얻었다. 부상자의 손쉬운 후송을 위해 뒷좌석을 탈착식으로 만든 것이나, 앞·뒷자리 높이를 달리 만들어 뒷자리에서도 창문을 전후좌우의 경계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XC2V 시제품을 지켜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정부가 세금 쓰는 방식을 바꿀 탁월한 군용차”라고 치켜세웠다. 로저스는 이때부터 개성을 중시하는 자동차 마니아층 사이에서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유년기부터 시작된 자동차 개발의 꿈

로저스는 유명 모터사이클업체 인디언모터사이클의 CEO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기계와 엔진 등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특히 장난감 자동차 모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한 그는 프린스턴대 재학 중 실제 자동차 제작에 나서기도 했다. 1995년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뒤 중국의 의료 벤처기업을 거쳐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을 다니다 해병대에 입대했다. 저격소대 지휘관으로 7년간 복무한 그는 이라크 파병 당시 동료 병사가 차량 사고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다시 자동차 제작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안전한 군용 차량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DARPA 공모전 우승작인 XC2V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로저스가 창업을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는 전역 후 하버드대에서 MBA 과정을 밟던 무렵이다. 로저스는 섬유업계의 전설적인 성공모델로 인정받는 티셔츠 회사 ‘스레드리스’에 대한 강의를 듣다 미래의 사업모델을 구상하게 됐다. 스레드리스는 온라인 상에서 티셔츠 디자인 공모전을 연 뒤 공모전에서 수상한 디자이너에게 상금을 주고 이를 상품화하는 ‘크라우드소싱(대중을 제품 생산 과정에 참여시키는 방식)’ 방식이다.

MBA를 수료하고 맥킨지 등에서 경영컨설턴트로 일하며 경영 감각을 익힌 그는 2008년 자동차 업체 로컬모터스를 창립했다. 대중이 기업의 제품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크라우드소싱을 통해 기존의 고루한 자동차 생산방식을 변혁해보자는 발상에 착안한 것이다.

○온라인 마니아들이 공동으로 디자인


로저스의 경영철학은 ‘집단지성으로부터의 혁신’이다. 그가 만든 ‘로컬모터스 커뮤니티’ 웹사이트는 수많은 디자이너와 엔지니어의 아이디어 집합소다. 세계 각지의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이 온라인 상에서 3차원 시뮬레이션 기술을 이용해 협업하면서 최적화된 디자인을 만든다. 로컬 모터스에 ‘세계 최초의 크라우드소싱 자동차 회사’라는 별명이 붙은 까닭이다.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업에서는 디자이너가 자동차를 디자인하면 설계도를 바탕으로 엔지니어들이 시제품을 만들고, 다시 디자인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로저스는 이런 절차를 간소화해 개발속도를 대폭 높였다. 스레드리스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자동차산업에 응용한 것이다.

로저스는 또 자동차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진짜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는 “진정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100% 능력이 발휘된다”며 “고용계약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일에 대한 애착과 열정을 바탕으로 그들의 재능을 살릴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신념으로 웹사이트에서 무급으로 일하는 수많은 인재들을 모을 수 있었고, 개발비용 또한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는 커뮤니티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참여 동기에 대해 “돈이 아니더라도 최고의 인재들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동기 부여가 된다”고 말했다.

디자인에 참여하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중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분야에서 여러모로 잔뼈가 굵은 경험자다. 로저스는 그중에서도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하는 젊은 대학생들에게 주목했고, 그들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성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현재 로컬모터스 커뮤니티에는 2만5000여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며, 로컬모터스는 이를 통해 6만개 이상의 자동차 디자인 시안을 보유하고 있다.

○성공비결은 ‘소규모 고효율’

로저스는 자동차 제작공정에서 ‘소규모 고효율’을 추구한다. 로컬모터스의 공장에는 컨베이어 벨트도, 조립로봇도 없다. 그저 조금 큰 차고 규모의 공장에서 12명의 직원이 수작업으로 차량을 조립한다. ‘마이크로 공장’이다. 자동차 제작은 수작업으로 이뤄지지만, 애초에 대량생산이 아닌 마니아들을 위한 맞춤형 소량생산에 집중하기 때문에 업무효율이 높은 편이다. 이마저도 자동차를 구매한 소비자가 직접 공장에 들러 회사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자동차를 조립하는 형태다.

로저스는 수(手)작업으로 설비투자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차를 만들고 싶어하는 마니아들의 수요를 노렸다. 부품도 새로 만들지 않고 기존의 제품을 다른 공장에서 조달하는 등 비용을 최소화했다.

로저스가 로컬모터스에서 내놓은 첫 번째 모델은 사막 경주용 자동차 ‘랠리파이터’였다. 2009년 공개된 랠리파이터는 유명 자동차 프로그램 ‘탑기어’에 소개될 정도로 화제를 모으며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로저스는 랠리파이터에 대해 “18개월 미만의 기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진 500여명의 인원이 온·오프라인에서 협업해 만들었다”며 “제작기간이 일반 자동차업체의 25% 수준이며, 중량은 기존 차량의 40%에 불과하고 자본집약도는 100배 더 나은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랠리파이터 개발에는 한국인 디자이너 김상호 씨도 참여했다.

로저스는 “로컬모터스의 성공은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을 바탕으로 개발비용을 줄이고 상품을 시장에 빠르게 유통했기 때문”이라며 “미래 자동차 산업은 소비자들의 기호 변화에 따라 물리적인 생산구조를 빠르게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