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틀사진은 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던 흑백 증명사진을 부랴사랴 확대하여 마련한지라 전체적으로 우중충한 기분을 줄 뿐 아니라 윤곽마저 희미하게 어룽거려 마치 급조된 몽타주 속의 인물을 연상시켰다. 조붓한 공간 속에 갇혀 겅성드뭇한 대머리를 인 채 움펑 꺼져 대꾼한 눈자위로 방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는 무엇에 놀랐는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어깨까지 한껏 곱송그리고 있어 방금 열병을 앓고 난 이 같았다.’

김소진의 소설 《쥐잡기》의 한 부분이다. 기자 출신 전업 작가인 그는 우리가 국어사전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형용사와 부사를 소설의 한 단락에 모아 이야기 속 상황을 꼼꼼히 전달했다. 처음 본 어휘이지만 읽다보면 생생하게 와닿는 표현들이 놀랍다.

《한글민주주의》의 저자인 한글학자 최경봉 원광대 국문과 교수는 한글이 우리 삶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답한다. 언어와 문자를 생활의 문제에서 재해석한 부분이 돋보인다.

저자는 한글에 대한 논쟁에는 늘 역사적 경험과 상처가 녹아 있다고 해석한다. ‘한자를 쓰면 안 된다’ ‘한글을 써야 한다’ ‘외래어는 고유어로 바꿔야 한다’ ‘한글 표기는 이렇게 해야 한다’ ‘자랑스러운 한글을 세계에 수출하자’ 등의 주장에는 정신과 가치관의 문제가 담겨 있다는 것. 그는 “그동안 한글이라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없었기 때문에 갈등과 혼란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한글민주주의’를 고찰한 저자는 우선 근대 초기의 국어 정책이 어떻게 민권을 향상시켰는지 설명한다. 한글은 말과 글이 불일치하던 한문의 시대를 끝내고 말과 글이 일치할 수 있는 국문의 시대를 열었으며, 대중의 알 권리와 말할 권리를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소리 문자가 필요하다는 역사적 요구에 응해 문자를 만들었다. 세종은 자신이 새로이 만든 문자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한문(漢文)’에 대비해 ‘언문(諺文)’이라고 불렀다. 근대화가 되면서 국가와 민족의 의미가 새로워졌고, 언문이라는 표현 속에 ‘속되다’는 뜻을 빼버리기 위해 ‘국문(國文)’이라는 말을 쓰게 됐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국문과 국어가 일문과 일본어를 뜻하는 이름이 되자 조선인들은 ‘국문’을 대신할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글 또는 문자라는 뜻으로 사용되던 한문(韓文)’을 풀어쓴 ‘한글’을 탄생시켰다.

저자는 근대화 이후 국어 정책과 교육이 어떻게 펼쳐져 왔는지 조망했다. 더 나은 한글민주주의를 위해 이주민에 대한 국어 정책도 포함시켰다. 언어적 불평등은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주민들의 인권과 복지, 언어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환경을 제안한다.

영어 광풍의 시대에 우리말로 말할 권리와 의무, 광화문 현판에 새겨진 정치 역학, 한글 소유권 등도 책 말미에 등장한다. 저자는 “우리말로 학문하고 그 결과를 우리말로 설명하는 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의무이자 권리이며 한글 소유권을 주장하기보다 그것을 제대로 쓰는 공동체가 곧 그 소유자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